와인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얼마 전 눈길을 끄는 통계가 발표됐다. 지난해 처음으로 로제 와인 판매량이 전체의 22%로 화이트 와인(18%)을 앞지른 것.또 영국에서는 로제 와인 소비가 지난 5년 사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요즘 로제 와인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로제 와인은 그동안 레드 와인에 묻혀 오랜 시간 빛을 받지 못한 '들꽃'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다양성과 개성을 추구하는 와인 애호가들과 여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와인시장의 새로운 '디바'로 떠오르고 있다.

프랑스의 로제 와인 생산지로는 남부 프로방스 지방,론 지방의 타벨,중서부 루아르 지방의 앙주 등이 손꼽힌다. 프로방스는 연간 1억병가량의 와인을 생산하는데 이 중 70% 이상이 로제 와인이다. 프로방스의 로제 와인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색이 옅고 타닌 함유량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프로방스의 롤스로이스'라고 불리는 도멘 느 오트의 '방돌 로제'(8만원대)가 대표적인 와인으로 그르나슈,생소(cinsault) 품종,무르베드르,시라 4개 포도 품종을 블렌딩해 만든다. 색은 옅은 장밋빛을 띠지만 맛은 매우 드라이하고 향이 강하다.

타벨 지역에서는 주로 그르나슈 품종으로 로제를 생산하며,생소 등을 혼합해 만들기도 한다. 주황빛이 감돌며 향이 풍부하고 타닌감이 상대적이 강하고 단맛이 적은 것이 특징.'엠 샤푸티에 타벨로제'(3만원대)는 연한 황갈색을 띠며 잘 익은 살구향에 탄탄한 구조감을 갖춘 와인으로 로버트 파커로부터 88점을 받았다. 칠링해서 식전주로도 즐겨 마신다.

앙주에서는 주로 밝고 환한 색의 로제 와인을 생산한다. 1170년에 설립된 샤토 드 페스레는 수세기 동안 여러 주인을 거치다 1991년에 가스통 레노트르가 인수해 재정비했다. '샤토 드 페스레 로제 앙주'(2만원대)는 그롤로(70%),카베르네 프랑(30%)을 블렌딩해 만들었으며 과일향과 함께 옅은 감초향이 균형을 이뤄 가벼운 여운을 남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생산되는 '화이트 진판델'은 불그스름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블러시 와인'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미국에서 로제 와인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었다. 1972년 셔터홈이라는 양조장에서 포도 품종의 일종인 진판델을 대량으로 발효하던 중 시설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들은 발효가 중단된 와인을 처분하기 위해 '화이트 진판델'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색이 옅어 화이트라는 이름을 붙인 이 와인은 달콤한 맛으로 예상 밖의 인기를 얻었고,이후 많은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화이트 진판델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셔터홈 화이트 진판델'(2만원)은 핑크빛에 딸기,수박의 향이 인상적이다. 딸기.로즈베리.시트러스 향과 미세한 기포가 느껴지는 갤로사(社)의 '터닝리프 화이트 진판델'(1만5000원)과 함께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로제 와인으로 손꼽힌다.

스페인은 '고품질.합리적 가격' 전략으로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다. '템프라뇨','가르나챠','보발' 등과 같은 스페인 토착 품종으로 만들어 다른 품종의 로제 와인에 비해 색깔이 진하고 화려하며 질감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북부 리오하 지역에 1970년 설립된 와이너리 마르케스 데 카세레스가 생산하는 '마르케스 데 카세레스 로사도'(2만5000원)는 템프라뇨(80%)와 가르나차(20%)를 블렌딩해 만들었다. '로사도'는 '로제'의 스페인식 발음이다. 짙은 체리색깔에 꽃향기가 풍부하다. '블루넌 핑크 아이스'(4만5000원)는 독일의 대표적인 와이너리 블루넌이 2003년부터 스페인 중동부 발렌시아 지역에서 생산한다. 템프라뇨(85%)와 그르나슈(15%)를 블렌딩해 만들었으며 잔에 얼음을 넣고 마실 때 맛과 향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진 독특한 와인이다.

톡 쏘는 탄산이 매력적인 스파클링 와인에도 로제가 있다. 본래 로제 와인은 레드 와인 품종으로만 만들도록 제한돼 있으나,샹파뉴 지방에서 로제 샴페인을 만들 때만 예외적으로 레드와 화이트를 섞어 만들기도 한다. 로제 샴페인은 청포도인 샤르도네와 적포도 피노누아를 블렌딩해 만든다. '동 페리뇽 로제 1998'(60만원대)은 최고급 로제 샴페인으로 풍부한 향과 약한 떫은 끝맛이 인상적이며 일반 로제 와인과는 달리 9~11년의 병 숙성을 거쳐도 로제 와인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이 밖에 로제 스파클링 와인으로는 '간치아 브라케토 다퀴'(3만2000원)가 있다. 이탈리아의 다퀴 지역에서 만든 와인으로 과일향과 장미향의 여운이 길게 지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