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이 미국 4위 투자은행(IB)인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산은 관계자들은 이 문제에 언급을 피하고있지만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산은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추진은 아직 '~ing'"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산은 관계자들도 비공식적으로 세계적 IB로 발돋움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며 여론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금융계 일각에선 국내 금융회사가 글로벌 무대로 도약하기 위해선 다소의 위험을 안고서라도 투자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편에선 산은이 몇 배나 덩치가 큰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한다 하더라도 통제.관리할 능력이 없으며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 물린 부실을 정확하게 몰라 자칫 산은 자체가 부실화할 가능성을 우려하며 반대론을 펴고 있다.

◆'리먼' 인수는 현재진행형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산은이 리먼 브러더스 인수 의사를 접은 게 아니다"라고 31일 말했다. 이 당국자는 "산은은 금융계 안팎의 여론을 봐가며 리먼의 △생존 능력 △인수 시 시너지효과 △리먼에 대한 적정 투자 규모 등을 분석하는 등 여전히 리먼 인수를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산은과 리먼이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산은은 리먼과 관련해선 구체적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민유성 행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은 "민감한 사안이라 언급하기 힘들며 개별 인수.합병(M&A)건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대답하고 있다.

산은 관계자들은 그러나 사석에선 "리먼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때문에 주가가 폭락한 지금이 글로벌 무대로 나갈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강조하고 있다. 산은 내부에선 부정적 견해에 대한 대응 논리를 가다듬는 등 여론 형성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눈치다.

◆"80억달러 버리는 꼴 될 수도"


한 시중은행장은 산은의 리먼 인수 추진에 대해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산은이 리먼을 관리할 수 없다는 것이 첫째다.

리먼이 산은에 인수되면 리먼의 핵심 인재들이 다른 IB로 대거 이탈할 가능성이 있고 결국 껍데기만 사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원,글로벌 네트워크 등 모든 측면에서 10배 이상 큰 리먼을 장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어 구사 능력 때문에 산은이 파견하는 한국인 관리자가 월스트리트에서 '왕따'를 당할 가능성도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규모.정확히 얼마를 상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투자 자체를 논하기 힘들다는 논리다. 이 은행장은 "리먼 지분 50%에 대해 장부가치 대비 50%의 프리미엄을 얹어 70억~80억달러가 거론되고 있는데 나는 만약 '버려도 되는 돈'이라면 리먼 투자를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100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

정찬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은행이 자체적으로 글로벌 IB로 성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만큼 통째로 인수하는 것이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미국 이외 국가의 글로벌 IB들도 미국 금융회사들을 M&A하면서 도약했다는 점이 찬성론의 근거로 꼽히고 있다.

실제 도이치뱅크는 뱅커스트러스트,UBS는 페인웨버를 인수한 이후 가파르게 성장,2000년대에 글로벌 플레이어가 됐다. 산은의 한 관계자는 "리먼 인수는 메이저로서 국제 머니게임 판에 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리먼의 시가총액이 올 들어 347억달러에서 111억달러로 70%나 급감한 것은 100년에 한 번 정도 올까말까한 기회"라고 진단했다.

찬성론자들은 또 위험에 베팅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으며,민간자본은 단기 수익에 급급한 반면 산은은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할 수 있다는 점도 내세우고 있다.

중국 싱가포르 중동 등의 국가에선 국부펀드나 정부 소유 은행이 글로벌 IB에 투자하거나 인수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