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자금이 400조원에 이르는 대기업들이 은행 대출과 회사채 발행 등으로 자금 조달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향후 경기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다 인수.합병(M&A)을 추진할 실탄을 준비해 두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LG경제연구원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대기업의 매출액 대비 영업현금흐름 비율은 1.9%지만 영업현금흐름이 마이너스인 기업의 비중은 41.1%에 달한다. 잘 되는 기업은 잘 되지만 잘 안 되는 기업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 608개 기업의 영업현금흐름을 전부 합산하면 25조원이다. 이 중 삼성전자 LG디스플레이 현대중공업 포스코 SK텔레콤 등 상위 10개사의 합계가 20조1000억원이었다. 상위 10개사가 전체 영업현금흐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80.4%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상장 기업들 사이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심각해진 것이다.

◆기업들 왜 자금 조달 늘리나

시중은행 대기업 대출 담당자들은 최근 기업들의 자금 수요에 대해 M&A 자금이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앞으로 경기나 시장 상황 악화에 대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병기 하나은행 기업금융부 차장은 "향후 자금시장 동향을 예측하고 미리 움직이는 기업들이 있다"며 "주로 대기업들이 자금 상황이 괜찮아도 앞으로 시장이 더 나빠지면 금리가 오르고 자금 조달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보고 자금 조달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부그룹 관계자는 "투자계획에 따른 자금을 마련했고 여유자금도 있지만 가능하면 추가로 자금을 조달할 생각"이라며 "현재 회사채 발행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같은 대외 여건 악화도 기업들이 자금 확보에 나서는 한 요인이다. 이기욱 SK에너지 자금팀장은 "유가 급등으로 원유 수입,정제,판매대금 회수 등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이 크게 늘어 올해 상반기에만 회사채를 9000억원어치 발행했다"며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 수준이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추가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원자재를 많이 사용하는 기업은 어디나 자금을 확보하려 할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GS칼텍스는 한동안 국내에서 회사채를 발행하지 않다가 최근 7년 만에 원화 표시 3000억원,달러 표시 1억8500만달러 규모로 회사채를 발행했다.

◆은행대출,시설투자 아닌 운전자금

은행 대출이 늘었지만 이 중 대부분이 시설투자자금이 아닌 운전자금이다. 올해 1분기 은행들의 기업대출 증가액을 보면 시설자금은 5조원 증가에 그쳤지만 운전자금은 12조원이나 된다. 세계 경제가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투자를 미루면서 일단 운전자금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대기업 대출이 올해 상반기에 1조9000억원 늘었는데 이 중 9000억원은 원자재 수입금액 증가에 따른 수입대금을 결제하는 내국수입유전스이고 나머지 1조원은 대부분 운전자금"이라며 "시설투자 자금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정재형 기자 j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