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 시인 >

나는 식물맹이다. 명색이 시를 쓴다면서도 나무와 풀의 신상에 관해선 아는 게 많지 않다. 외국인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듯이 나무 앞에 서면 그들이 건네오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무르춤해지곤 한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뒤늦게 외국어 공부라도 하듯이 수목도감을 들고 한동안 산책을 다녔다.

지난 여름 나는 석류나무를 외국인 교우록의 한 페이지로 장식했다. 점심을 들고 회사 근처의 성미산 쪽으로 산책을 나가다가 어느 집 담벼락 옆에 서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 탐스러워 보이지 않는 그가 하필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침 화단에 거름을 주고 있던 주인 사내의 혼잣말을 듣게 됐기 때문이다.

주인 사내는 골이 잔뜩 난 사람처럼 그 앞에서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 놈의 석류,올해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잘라버리고 말테다!"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나무를 잘라버리다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며느리에게 엄포를 놓는 시아버지처럼 사내의 목소리는 짐짓 협박조였다. '잘라버리고 말테다'에선 협박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은근히 악센트를 더했는데,그 억양이 사람에게 하는 것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좀 모자라 보이는데 실성한 사람인가? 나무를 베기 위해 도끼나 톱을 쓰는 대신 나무를 빙 둘러싸고 고함을 질러서 그 서슬에 놀란 나무가 스스로 백기를 들고 쓰러지게 한다는 어느 원시 부족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묻는 내게 사내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주위에 다른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내 귀를 좀 빌리자고 청해왔다. 마치 무슨 긴한 비밀이라도 들려주는 듯한 태도였다. "지금 석류를 겁주는 중이라오.어찌된 영문인지 벌써 두 해째 석류가 열매를 맺지 않아서…."

쿡,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의 어조가 사뭇 진지해서 경청을 하지 않으면 무례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석류나무가 들으면 안 된다는 투로,이 협박이 연극이라는 게 들통 나면 석류나무가 올해도 열매를 맺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못 걱정스런 어투로 그는 소곤거렸다. 얼떨결에 나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석류나무를 협박해서 열매를 맺고자 한 사내의 바람은 좀 엉뚱하긴 하지만 유쾌한 면모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나무와 사람의 소통을 전제로 한 행동이어서 그렇다. 자신의 말을 나무가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와 같은 말건넴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내의 말끝에,어린 시절 닭을 잡는 날은 닭 앞에선 닭 잡는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닭도 생명인데 그 앞에서 대놓고 살생을 운운하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주인 사내는 그 예의를 짐짓 저버리는 애교 섞인 연극을 통해 석류나무의 생명을 북돋우고 있었던 셈이다.

이후,틈나는 대로 나는 점심 끝 산책길에 석류나무를 방문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완숙할지 어떨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꽃받침 위로 아기 종주먹처럼 뭉친 석류가 여간 대견스러운 게 아니다. 협박이 통했던 것일까? 아무려나,내게는 또 하나의 외국인 친구가 생겼다. 한철을 같이 보낸 벗과 더 잘 어울리기 위해 내 외국어 교본은 겉장이 나달나달해져가고 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친교를 맺기 위한 노력이 딴은 가상했던지 식물들이 지닌 저마다의 개성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올 가을에는 한철을 같이 보낸 인연 하나로 석류나무의 통역관 노릇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나 나나 막히면 보디 랭귀지를 쓰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노릇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