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고 유능한 변호사(영수)가 애 딸린 이혼남과 결혼한다. 전처가 키운다던 약속과 달리 아이는 아빠한테 온다. 공부와 일밖에 모르던 영수는 아이의 머리를 예쁘게 손질해주기 위해 미용실에서 마네킹과 가발을 빌려다 연습한다. 장안의 화제작 '엄마가 뿔났다'가 그리는 전문직 여성상이다.

누가 뭐래도 자녀 양육은 여자 책임이라는 얘기다. 드라마뿐이랴.광고는 한술 더 뜬다. 일하는 엄마에게 아이가 아프다고 전화,퇴근을 유도한다. '쇼를 하면 엄마가 일찍 온다'면서.이런 내용도 있다. "아빠는 언제부터 매운 것 잘 먹었어요? 엄마랑 결혼하고부터.나도 엄마랑 결혼해야지."

엄마는 '요리하는 사람'인 셈이다. '직업 없이 결혼 없다'고 할 만큼 맞벌이가 일반화돼 있는데도 미디어 속 여성의 성 역할은 여전히 살림과 육아에 고정돼 있다. 세탁기와 냉장고 광고는 여성,자동차와 컴퓨터 광고는 남자 몫이다. 두 달간 공중파 4개 채널 프로그램 25개에서 발견된 성(性) 차별 사례만 1104건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다.

유럽도 사정이 비슷한 걸까. 유럽 의회가 '남자는 밖에서 세차하고 여자는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식의 광고 중단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채택했다는 소식이다. 회원국 정부엔 고정된 성 역할을 강화시키는 광고를 보다 철저히 감시하기를,언론과 광고업체엔 모범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고도 한다.

"남녀의 역할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리는 광고들이 시대에 뒤진 성 역할 개념 추방을 어렵게 한다"는 이유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1970년대에 대중매체와 광고에 나타난 여성상 연구가 시작되고 80년대부터는 내용상 성 차별 방지를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는데도 해결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미디어의 힘은 무섭다. 눈만 뜨면 마주하는 방송이나 광고에 깃든 성 차별적 요소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심을 가능성이 높다. 고정관념에 따른 남의 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쪽은 남자가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세차와 설거지 담당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매체와 광고계의 의식 전환을 기대한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