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로 한 달을 맞는 그루지야 사태로 러시아와 서방국 간 '신냉전' 기류가 형성되면서 러시아경제에 '빨간 불'이 켜졌다. 정치적 리스크가 커지면서 풍부한 자원과 연 7~8%대의 높은 성장률에 매료돼 러시아로 몰려들던 외국자본이 급속히 빠져나가고 있다. 지난 몇 달간 합작 석유회사인 TNK-BP의 경영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영국 간 갈등으로 서구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던 차에 그루지야 사태가 결정타를 날린 셈이다. 외자가 이탈하면서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고 주식시장도 휘청거리고 있다. 러시아 기업들의 자금조달 비용도 높아졌다. 러시아의 경제성장은 외국자본 유치와 해외시장 진출 확대에 달려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억제시킬 수 있는 힘은 서방국들의 위협이 아니라 '시장의 힘'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정정불안 불똥,루블화 폭락

지난 주말 루블화 가치는 유로ㆍ달러 대비 30.41루블까지 떨어졌다. 이는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유로ㆍ달러 복수통화 바스켓방식을 도입한 이래 최저치다. 3,4일 이틀간 2%나 빠졌다. 루블화 환율은 달러대비 루블화 가치와 유로대비 루블화 가치를 각각 55%와 45% 비율로 합산해 산정한다. 루블화의 달러에 대한 가치도 달러당 25.47루블까지 폭락했다. 루블화의 달러에 대한 가치는 올해 최고치였던 지난 7월14일의 23.15루블과 비교하면 두 달 새 9%가량 폭락했다. 참다못한 러시아 중앙은행은 통화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지난주 시장개입에 나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4일 러시아 중앙은행이 35억~40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을 푼 것으로 추정했다.

올 들어 루블화는 그루지야 사태 직전까지만 해도 4% 정도 올랐다. 원유 등 원자재값 급등으로 대규모 무역흑자를 보이면서 외자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루블화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절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에 개입해 왔다. 그러나 최근 두 달 새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거 빠져나가자 정반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러시아를 빠져나간 자금 규모가 지난달 11~22일 2주간에 걸쳐 210억달러에 달했다고 추정했다. 이는 1998년 러시아가 외환위기로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을 선언한 이후 가장 빠른 속도다. 8월 마지막주엔 외자유출 규모가 17억달러로 줄었지만 최근 루블화 가치 급락세를 감안하면 이달 들어 대규모 외자유출이 재개됐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중앙은행은 그루지야 사태 이후 외국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8월 전체 외자 이탈액은 50억달러에 불과하다며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외자유출로 러시아 증시도 맥을 못추고 있다. 러시아 RTS지수는 지난 5일 1469.15에 마감됐다. 2006년 9월 이후 약 2년 만에 최저치다. 그루지야 사태 발발 직전인 지난 7일 이후 17% 하락했고 올해 최고점이던 5월19일(2487.92)에 비하면 40%가량 떨어졌다. 기업들의 자금차입 여건도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 국영 가스업체인 가즈프롬의 5년 만기 채권 '크레디트디폴트스왑(CDSㆍ채권의 부도 위험에 대비한 보험성격의 파생상품) 스프레드는 최근 2.57%포인트로 확대됐다. 1년 전에는 1.18%포인트였다. 이는 1000만달러어치 가즈프롬 채권이 5년 내 부도날 위험에 대비하는 비용이 1년 전 11만8000달러에서 현재 두 배가 넘는 25만7000달러까지 치솟았다는 뜻이다. 그만큼 투자자들은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하기 때문에 기업들의 자금 조달비용이 늘어난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 당시 주러시아 미국 대사를 지냈던 제임스 콜린스는 "러시아도 그루지야 사태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며 "이번 사태가 경제 측면에선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경제지표들이 보여준다"고 말했다. FT는 그루지야 사태가 진정국면이고 러시아에 대해 특별한 경제제재가 가해진 것도 아닌데 투자자들이 루블화 자산을 팔아치우는 이유는 그만큼 정치적인 리스크를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경제여건이 악화되자 러시아 기업인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나 그의 후계자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친분관계 때문에 사업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해서다. 실제 일부 유럽연합(EU) 정책결정자들은 러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러시아 거대재벌(올리가르히)의 돈줄인 유럽,특히 런던의 금융가를 압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혁 후퇴로 경제성장 둔화되나

현재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5810억달러로 세계 3위다. 200억달러를 밑돌던 1998년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하면 대폭 늘어난 셈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순채권국이다. 최근 루블화 급락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2의 루블화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없다. 그러나 서방국과의 갈등고조로 러시아 경제가 고립되고 지금까지 고성장을 이끌었던 경제개혁이 정체되면 최근 수년간 러시아가 보여줬던 고도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앤더스 애스룬드 선임연구원은 최근 모스크바타임스 기고에서 "러시아 정부는 현재 미국의 4분의 1 수준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2020년까지 절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면서 "이를 달성하려면 경제개혁이 필요하지만 러시아 정권의 독재 성격이 짙어지면서 개혁 기대가 물건너 갔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가급등,민간기업 활성화 등 러시아의 고성장을 이끌었던 요인들이 모두 약해지고 있다"며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낙관적인 견해도 있다. JP모건 자산운용의 올레그 버율요프 이머징마켓 담당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그루지야 사태와 인플레 우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가 여전히 호황기를 누리고 있으며,탄탄한 내수 덕에 올해 8%의 성장률을 달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최근 러시아 주가하락의 3분의 2는 원자재 및 원유 가격 하락에 따른 것이며 그루지야 사태 영향은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또 러시아 시장에 진입하는 신규 투자자들이 좀 줄겠지만 기업들이 계속 좋은 실적을 내고 배당을 많이 하면 다시 분위기가 바뀔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