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집을 나간 지 20분쯤 지나 전화벨이 울렸어요. 수화기를 들자 교통사고로 남편이 사망했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죠."

김영숙 선일금고제작 대표(53)는 남편이 사망한 4년 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떨려 일손을 잡을 수 없다고 털어놨다. 김 대표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지금까지 달려왔다"며 "회사를 팔아 치울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최고의 금고를 만들겠다'며 공장에서 수시로 밤을 새웠던 남편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선 때는 2004년 12월 남편인 고 김용호 회장이 아침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였다. 한국전쟁 고아 출신인 김 회장은 1973년 회사를 창업한 뒤 금고의 3대 인증인 UL(미국) SP(스웨덴) GOST(러시아)를 모두 따낼 정도로 금고 개발에 매달려왔다. 김 회장이 만든 금고는 동종(銅鐘)이 녹아내렸던 2004년 4월 낙산사 화재에서도 내용물이 안전하게 보관됐을 정도로 멀쩡했다. 김 대표는 "가족여행 한번 제대로 못가고 처자식보다 금고에 미쳐 살아온 남편이 얄밉기까지 했다"고 회상했다.

김 대표는 경기도 파주세무서 공무원 시절 남편과 만나 1976년 결혼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인 남편을 도와 회사 경리업무를 보면서 내조해 온 세월만 30여년.김 대표는 "남편 옆에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운 게 혼자서 회사를 꾸려나가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경영을 책임지게 된 뒤 연구개발은 물론 생산 영업부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직원들과 땀을 흘렸다. 해외거래처 발굴을 위해 외국에도 자주 나갔다. '이글세이프'(EAGLE SAFES) 브랜드를 내세워 수출국을 남편 생전 80개국에서 100개국으로 확대했고,금고 모델도 80여개에서 100개로 다양화했다. 2006년엔 중국 장쑤성 쑤치안에 공장도 세웠다. "밤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휴일에도 거래처를 찾아다니느라 살림은 팽개치다시피했어요. 하지만 결코 힘든 내색도,눈물도 보이지 않았죠."

김 대표는 그동안 기업체 및 관공서의 사무실 구석을 지켜온 금고를 앞으로 아파트 거실을 점령하는 '생활가구'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2년 동안 30억원을 들여 직원들과 공장의 식당밥을 먹어가며 개발한 블랙과 와인 컬러의 가정용 금고 '루셀'(LUCEL)을 지난 7월 선보였다. 김 대표는 "일반 금고 가격의 세 배가 넘는 132만원에 팔고 있는데 두 달여 만에 100개 넘게 팔려나갔을 정도로 인기"라고 소개했다.

김 대표는 고려대 제어계측공학과를 졸업한 장녀 김은영 상무(32)에게 연구개발과 생산을,이화여대 경영학과를 나온 차녀 김태은 차장(30)에게는 총무와 마케팅을 각각 맡겼다. 그는 "나도 남편처럼 사고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며 "위기 때 회사경영에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 딸들에게 경영승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올해 수출 1200만달러를 포함,150억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며 "남편의 꿈인 '1등 금고 회사'로 키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