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승계는 일본의 전통이다. 동네 우동집에서부터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수 대(代)에 걸쳐 가업을 물려 내려온 곳이 적지 않다. 창업한 지 100년 넘은 장수기업이 5만개,200년 이상 기업도 3100여개나 된다. 일본의 얼굴인 도요타자동차도 오너 가문이 3대째 경영권을 이어온 가업승계 기업이다. 대를 이어 가업을 유지하면서 경영이념과 기술 노하우를 전수해온 것이 일본 기업과 일본 경제의 경쟁력 비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업승계가 정치로 넘어오면 빛을 바랜다. 일본 정치에도 가업승계가 많지만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최근 1년 새 비슷하게 총리직을 그만 둔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모두 유력 정치인의 2세라는 점도 그렇다. 후쿠다 총리는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1976~1978년 재임)의 장남이다. 아베 전 총리는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의 아들이다.

연이은 돌연 사임으로 두 총리는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참의원 선거 참패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아베 총리는 작년 9월 초 예고없이 기자회견을 열고 "건강이 안 좋다"며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를 이은 후쿠다 총리도 지난 1일 밤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청해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국민의 안위나 국익은 안중에 없고,일이 안 풀린다고 '총리 못해 먹겠다'며 자리를 내팽개친 인상이 짙다. 후쿠다 총리의 사임으로 당장 지난주 예정됐던 북한의 일본인 납치피해자 재조사는 무산됐다. 21일로 예정됐던 한국ㆍ중국ㆍ일본 등 3국 정상회담도 무기 연기됐다.

후쿠다 총리는 사임 발표 이후 정례적인 언론 취재에도 응하지 않아 '국정 책임자로서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아베와 후쿠다 총리의 이 같은 케이스를 '도련님의 한계'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들은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뒤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 받아 정치에 입문했다. 선친이 닦아놓은 조직 등 기반을 이용해 한번의 낙선도 없이 순탄하게 정상에 올랐다. 평생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았으니 난관을 극복할 경쟁력이 없는 셈이다.

원로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요즘 2세,3세 정치인은 배짱도 없고 근성도 없다"며 한탄했다.

실제 아베와 후쿠다 총리는 재임 중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하나 딱부러지게 결심하고 처리한 일이 거의 없다. 국민연금 부실 기록 사태가 터져도 뒷수습에만 매달렸다. 방위성 차관이나 각료들의 비리 등에도 칼을 빼들지 못했다. 경제정책도 '개혁'과 '보수'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좌고우면했다. 결단력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 두 사람 모두 막판에 20%대의 바닥 지지율을 보였다.

그런 점에서만 보면 한국은 다행이다. 한국의 대부분 정치 리더는 '자수성가형'이다.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직전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닥에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정상에 오른 정치인이다. 특히 이 대통령은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성공신화를 이룬 주인공이다. 그런 대통령이기에 아무리 심각한 경제 위기라도 결단력과 근성을 갖고,극복해주길 기대한다면 지나친 희망일까.

도쿄 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