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피아니스트' 이경숙 "피아노 건반은 흑백이지만 칠때마다 다른 색깔 음악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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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국내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 32곡 완주,이듬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1991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2000년 샤무엘 바버의 피아노 전곡 연주….
한국 1세대 피아니스트 이경숙 연세대 음대 학장(63·사진).그는 열악한 한국 클래식계에서 연주와 교육의 영역을 동시에 빛낸 음악인으로 불린다. 그에게는 빈 고전파 음악의 최고권위자인 피아니스트 한스 레이그라프의 "훌륭한 연주는 교육에 도움을 주고 교육을 통한 작품 분석은 연주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가 내년 2월 정년 퇴임을 앞두고 이달 말과 12월 초 호암아트홀에서 독주회를 잇달아 갖는다. 오는 30일에는 하이든과 베토벤,코플런드,브람스의 변주곡을 들려주고,12월5일에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31번,32번을 연주한다. 서울 내수동에 있는 이씨의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씨는 1967년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한 이후 40년 가까운 음악 인생을 "끝이 없는 여행"이라고 정의했다. "음악은 연습실에서든 무대 위에서든 피아노를 칠 때마다 다른 색깔로 나오는 '순간의 예술'이에요. 앞으로도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신이 나죠."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 밑에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한 그는 6·25 전쟁 직후인 1956년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특상을 받으며 국내에 이름을 알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한동일,신수정 전 서울음대 학장 등이 당시 음악의 꿈을 함께 키우던 이들이다. 이씨는 서울예고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했다. 1968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실황이 미국 전역에 방영되면서 그의 이름은 해외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간 악보가 원본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시작한 경우도 수없이 많다. 한국인 유학생이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간첩으로 몰린 적도 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음악이 좋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전곡 연주자'로 이름을 떨쳤다. "어떤 도전의식이 있었다기보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 전곡 연주를 했습니다. 전곡 연주를 통해 공부한 것을 학생들에게 다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죠.학생들에게 배운 것이 연주에 도움이 되기도 했죠."
퇴임을 앞두고 섭섭하지 않냐는 질문에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바쁠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그동안 돌봐주지 못했던 제자들의 음악회도 가보고,연습도 마음껏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음반도 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동안 스튜디오 안에서 엔지니어의 지시대로 연주하는 게 인위적인 것 같아 연주 실황 외의 음반을 내본 적이 없지만 제자인 피아니스트 박종훈씨가 자신의 음반사에서 함께 작업하자고 조르는 바람에 마음이 기울었다. "제자니까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해볼까 해요."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한국 1세대 피아니스트 이경숙 연세대 음대 학장(63·사진).그는 열악한 한국 클래식계에서 연주와 교육의 영역을 동시에 빛낸 음악인으로 불린다. 그에게는 빈 고전파 음악의 최고권위자인 피아니스트 한스 레이그라프의 "훌륭한 연주는 교육에 도움을 주고 교육을 통한 작품 분석은 연주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가 내년 2월 정년 퇴임을 앞두고 이달 말과 12월 초 호암아트홀에서 독주회를 잇달아 갖는다. 오는 30일에는 하이든과 베토벤,코플런드,브람스의 변주곡을 들려주고,12월5일에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31번,32번을 연주한다. 서울 내수동에 있는 이씨의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씨는 1967년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한 이후 40년 가까운 음악 인생을 "끝이 없는 여행"이라고 정의했다. "음악은 연습실에서든 무대 위에서든 피아노를 칠 때마다 다른 색깔로 나오는 '순간의 예술'이에요. 앞으로도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신이 나죠."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 밑에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한 그는 6·25 전쟁 직후인 1956년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특상을 받으며 국내에 이름을 알렸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한동일,신수정 전 서울음대 학장 등이 당시 음악의 꿈을 함께 키우던 이들이다. 이씨는 서울예고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했다. 1968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실황이 미국 전역에 방영되면서 그의 이름은 해외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간 악보가 원본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시작한 경우도 수없이 많다. 한국인 유학생이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간첩으로 몰린 적도 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음악이 좋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전곡 연주자'로 이름을 떨쳤다. "어떤 도전의식이 있었다기보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 전곡 연주를 했습니다. 전곡 연주를 통해 공부한 것을 학생들에게 다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죠.학생들에게 배운 것이 연주에 도움이 되기도 했죠."
퇴임을 앞두고 섭섭하지 않냐는 질문에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바쁠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그동안 돌봐주지 못했던 제자들의 음악회도 가보고,연습도 마음껏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음반도 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동안 스튜디오 안에서 엔지니어의 지시대로 연주하는 게 인위적인 것 같아 연주 실황 외의 음반을 내본 적이 없지만 제자인 피아니스트 박종훈씨가 자신의 음반사에서 함께 작업하자고 조르는 바람에 마음이 기울었다. "제자니까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해볼까 해요."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