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현대자동차 수뇌부는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의 기아차 연구소를 둘러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우선 그 인력과 기술 수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데 놀랐고,현대차가 진작 수도권에 터를 잡지 못했던 것에 크게 후회했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그 뒤 기아차와 연구개발부문을 통합하면서 그동안 주력으로 삼았던 울산연구소 인력 대다수를 경기도 화성의 남양연구소로 옮겼다.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게 수도권 문제의 본질이다. 기업들이 왜 지방을 마다하고 수십년 동안 계속되어온 정부의 수도권 억제정책을 거슬러 굳이 수도권에 집착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다른 편리함 어떤 것보다 기업 경쟁력의 핵심인 우수한 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이점 때문이다.

우리 수도권 규제는 애초 시대착오적 정책이었다. 1982년부터 시행된 대표적 규제법령인 '수도권정비계획법'은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와 산업을 재배치해 국토의 균형발전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학교 공장 업무용 건축물 등 인구집중유발시설의 수도권 내 설치를 철저히 억제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보다 더 심한 수도권 과밀을 겪었던 선진국들은 이미 거꾸로 가고 있었다. 줄곧 수도권 억제 정책을 펴오던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1981년과 1985년 규제를 완전 폐지하고,일본 또한 1983년부터 수도권 공업규제를 완화해오다가 2000년대 초 아예 규제법 자체를 없앴다. 어떤 규제로도 수도권 집중을 막을 수 없고,결국 도시경쟁력과 국가경쟁력만 갉아 먹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우리의 경우 수도권정비계획법 말고도 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환경정책기본법,군사시설보호법 등 무려 10여 가지에 이르는 각종 법령이 그물처럼 수도권을 옭아맸지만,실제 의도한 성과를 거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1980년 1330만명으로 전체 인구 3743만명의 35%였던 수도권 인구는 지금 줄잡아 2400만명으로 전체 인구 4900만명의 거의 절반이다. 수도권 규제는 실패한 정책에 다름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국토의 균형발전을 통한 지역 간 소득격차 축소,사회적 형평성 제고라는 지난 참여정부의 그럴 듯한 정치적 이념은 수도권 규제를 더욱 굳게 지탱하는 무기였다. '수도권규제=지역균형발전'의 착각에 사로잡힌 정치논리는 수도권에서 뺏어 지방으로 밀어내자는 퇴행적 제로섬(zero sum)게임을 의미했다.

하지만 기업들로서는 수도권이 안 된다고 해서 승산없는 지방을 돌파구로 삼을 수는 없었다. 기업들은 주판알 퉁겨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곳에 투자하게 마련이다. 중국이든 동남아든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떠나고,자본과 시장의 국경이 없어진 오늘날 그런 현상은 더 하다. 수도권에서 해외로 나가는 기업은 매년 1000개에 달한다. 돈과 일자리가 빠져나가는 이런 현실을 정부나 관료집단이 모를 리 없는데도 눈감고 있는 사이 기업들은 탈출 러시를 이루고 국가경쟁력은 뒷걸음질만 쳐온 것이다.

수도권 규제 완화 방안이 이제서야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과연 어느 정도로 규제가 풀릴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부가 진정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 창출을 우선하는 '기업 프렌들리' 정부인지 그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인 까닭이다. 적어도 하이닉스반도체가 공장을 넓히려고 26년 전 마련했던 이천공장 옆 1만8000평의 땅에 아직 공장을 짓지 못해 상추 심고 콩밭 일구는,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