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사ㆍ외국인, 채권 동반 투매 … 시장 '패닉'

국내 자산운용사의 채권매니저 A씨는 18일 점심 때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채권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락했기 때문이다. 이날 3년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날보다 0.29%포인트 오른 연 5.89%에 거래를 마쳤다. 장중 한때 채권금리가 0.4%포인트 이상 치솟기도 했다. A씨는 "채권금리가 이렇게 급등한 것은 최근 수년간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채권시장이 패닉에 빠졌다"고 말했다.

◆채권시장 극도로 불안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며 주가가 폭락할 때마다 오히려 강세를 보이곤 했던 채권값이 이날 폭락한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를 꼽고 있다.

우선 채권시장에 '국내 금융사의 원화 유동성 경색'우려가 새롭게 부각돼 투매를 부추겼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국내 금융사들이 파산보호를 신청한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와의 거래로 손실을 입게 될 경우 자금난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초 금융감독원이 국내 금융사의 리먼브러더스 관련 익스포저(위험노출금액)가 7억2000만달러라고 발표했지만 일각에서 '파생상품을 포함할 경우 실제 금액은 훨씬 더 크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우려가 확산됐다. 실제 금감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국내 금융사들이 리먼브러더스 서울지점과 거래한 파생상품 잔액은 지난 7월 말 현재 30조원이라고 밝혔다.

여기에다 일부 중소형 증권사들이 '하루짜리 콜자금 차입에 애를 먹고 있다'는 소문까지 가세하면서 불안심리가 증폭됐다.

외국인이 채권 투매에 나선 것도 한 요인이다. 외국인은 이날 장초반 국채선물을 2500계약(1계약은 1억원)가량 순매수했지만 이후 매도세로 전환,결국 3000계약 이상을 순매도했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외국인의 채권 평가액에 영향을 미치는 통화스와프(CRS)금리가 이날 폭락하면서 채권 평가손실이 늘어난 외국인들이 손절성 채권매물을 대거 쏟아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CRS금리는 장중 한때 72bp(0.72%포인트)나 폭락했다. 이는 미국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의 유동성 위기로 국제 금융시장에 '신용경색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3월보다 훨씬 낙폭이 큰 것이다.

◆원화 유동성 부족 심각한가

정책당국은 이날 채권시장 패닉에 대해 '과민반응'이라는 입장이다. 금감원은 국내 금융사가 리먼브러더스 서울지점과 거래한 파생상품 규모가 30조원이지만 "대부분 위험하지 않은 거래"라고 밝혔다. 파생상품 거래액 중 국내 금융사가 리먼브러더스로부터 회수해야 하는 채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이날 환매조건부증권(RP)만기도래액 중 3조5000억원가량을 자금시장에 투입했다. 정희전 한은 금융시장국장은 "불안심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며 "콜시장에 자금이 충분하며 국내 금융사들이 신용경색에 빠질 위험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채권 전문가들은 불안 심리가 확산된 데 따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신동준 현대증권 채권분석팀장은 "최근 '9월 위기설'과 리먼브러더스 파산신청 등으로 시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며 "실제 상황이 심각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문제가 있다'는 의심이 들면 '일단 던지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채권시장 관계자는 "'9월 위기설'도 사실을 별 것 아니었지만 정책당국이 초기 대응에 실패하면서 위기설이 위기를 부르는 양상으로 확대됐다"며 "앞으로 정책당국의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