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케인의 러닝 메이트 페일린은 말 그대로 슈퍼우먼이다. 그런데 과연 슈퍼우먼이라는 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미국 현지의 페미니스트들 중 일부는 페일린을 "스텝포드 와이프(The Stepford Wivesㆍ겉으로만 완벽해 보이는 가정주부)"로 비난하고 있다. 그녀가 제시하고 있는 완벽한 여성상이 사실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페일린에 관한 일화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막내 트리그와 관련된 것들이다. 사람들에 의하자면 페일린은 막내가 다운증후군인 것을 알면서도 낳았다고 한다. 낙태 자체를 거부하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녀의 결정에 환호했다. 엄밀히 말해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낙태하느냐 낳느냐라는 문제는 선택의 문제를 초월하고 있다. 장애를 가지고 있든,병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수정된 생명체는 존중돼야 한다. 그것은 물론 당위이다.

페일린의 선택은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낳기를 포기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도덕적 경계를 건넨다. 원칙적으로 페일린의 선택은 윤리적 선에 해당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현실을 고려해보면 대답이 쉽지만은 않다.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을 때 아이의 양육에는 여러 가지 제한이 따라온다. 더 많은 애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정책적 문제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트리그 출생에 관련된 일화의 또 다른 하나는 바로 페일린이 아이를 낳자마자 3일 만에 일에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는 삼칠일이라는 전통적 경계의 시간이 있다. 이 기간만큼은 아이나 어머니나 타인들과의 접촉을 삼가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출산 후 21일간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인에게 합의된 전통적 육아 휴직의 기간이다. 그런데 페일린은 상처가 아물고 젖이 마르기도 전인 3일 만에 일에 복귀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페일린은 초인적 어머니이자 여성인 셈이다.

문제는 페일린이라는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초월적 힘이 보통의 여성들을 결격 사유가 있는 낙오자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다섯 아이를 누구의 도움없이 낳고 키웠다는 페일린은 일 때문에 아이 낳기를 미루는 여자들을 따돌린다. 한편 경제적,육체적으로 육아의 고통을 호소하는 보통 여자들은 페일린 앞에서 투정꾼에 불과해진다. 심지어 페일린은 "육아 휴직이나 의무 놀이방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여성이 사회적 일원으로서 참여하기 위해 힘들게 쌓아 온 사회적 합의들을,페일린이 자신의 초월적 능력으로 무마하는 것이다. 그것도 단 한순간에 말이다.

얼핏 보면 페일린은 스스로를 '하키맘'으로 칭하며 평범한 보통 여자의 대변인인 듯 군다. 하지만 페일린의 행간을 살펴보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초월성을 요구하는 강요가 숨어 있다. 이 강요는 남성들이 그 동안 여성들에게 해온 그것과 꼭 닮아 있다. 3일 만에 일에 복귀할 수 없다면,법령에 제시된 육아 휴직을 꼼꼼히 다 챙겨 먹을 요량이면 회사를 관두시지요 라든가. 육아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몫이라는 태도 말이다. 사회적 모성이란 한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정립되어야 할 일종의 체계이다.

페일린처럼 슈퍼 우먼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의 여성들은 3개월의 육아 휴직과 체계적인 육아 시스템이 필요하다. 보통 여성들의 요구란 한편 가장 합리적인 보편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보통 여성들의 요구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페일린의 행동들이 사회적 전범으로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란 뜻이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소외시킨다. 보통 여성의 대명사로 여성의 권익을 대변한다지만 페일린은 립스틱을 바른 마초와 닮아 있다. 그녀의 등장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