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부가 금융회사들의 부실을 한꺼번에 청소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배드뱅크(Bad Bank)인 정리신탁공사(RTC)를 만들어 금융회사의 잠재 부실자산을 한꺼번에 사들이는 게 골자다. 매입 규모는 최대 8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금융회사들이 잠재부실까지 털어내 금융시스템이 정상화되는데 도움이 될 전망이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선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이 필요한 데다,모럴 해저드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아 의회 입법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18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민주당)을 비롯한 의회 지도자와 협의를 마치고 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본시장이 안고 있는 구조적 위기와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라며 "각 금융회사의 부실자산을 처리하기 위한 종합적 방안을 마련하고 있으며,이는 입법을 필요로 하는 내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폴슨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부실채권전담기구인 RTC 설립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RTC는 1989년 저축대부조합(S&L) 사태 때 파산 금융사의 부실자산을 인수하기 위해 설립된 적이 있다. 이 RTC는 1995년 해산할 때까지 총 3940억달러를 들여 747개 회사의 부실채권을 해소했다. 이를 통해 S&L의 연쇄 파산에 따른 혼란은 최소화됐다.

미 정부가 다시 RTC 카드를 꺼내든 것은 개별 회사의 부실문제를 해소하는 것만으론 들불처럼 번지는 금융경색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베어스턴스와 패니메이 프레디맥 등 모기지(주택담보대출)회사,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 등 부실 금융사에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위기를 진정시키는데 역부족이었다.

한 금융사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다른 곳이 계속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모든 금융사들의 잠재부실을 사들이는 것밖에 없다는 절박감이 작용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부실자산 매입 규모가 8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2조달러의 공적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에 추진되는 RTC는 지난 S&L 사태 때와는 약간 다르다. 당시엔 파산 회사의 부실자산을 매입해 처리했다. 하지만 이번엔 파산하지 않고 영업 중인 회사의 부실채권까지 모두 사들인다는 방침이다. 이런 방안이 실현되면 금융시스템 정상화에 상당히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금융회사로서는 우량자산만을 갖고 클린 컴퍼니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당장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하다. 적게는 수천억달러에서,많게는 수조달러가 소요될 것이란 게 월가의 추산이다. 물론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도 RTC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입법조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의 모기지대출도 일정부분 탕감해줘야 한다는 게 민주당의 생각이다. 어떤식으로든 모럴 해저드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월가에서는 이 같은 사정을 감안하면 RTC는 빨라야 내년 초에나 본격 가동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편 영국도 금융위기 해소를 위해 부실채권처리 전담기구를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더 타임스가 이날 보도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하영춘 기자 iklee@hankyung.com


<용어풀이>

◆정리신탁공사(RTCㆍResolution Trust Corporation)=금융회사의 부실자산이나 채권만을 사들여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배드뱅크(bad bank)의 일종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만들어져 금융사들의 부실자산을 정리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와 유사하다. 미국에선 1989년 저축대부조합(S&L) 사태 때 만들어졌다가 1995년 해산했다. 금융사들로부터 부실자산을 사들인 뒤 이를 쪼개거나 묶어서 투자자들에게 되파는 방법으로 자금을 회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