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BC가 금융시장에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신뢰성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외환은행 매매계약을 뒤집은 것은 무엇보다 가격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전 세계에서 굵직한 금융회사가 매물로 쏟아지면서 지난해 계약한 외환은행 인수금액 정도라면 더 좋은 금융사를 골라잡을 수 있다는 최근의 상황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가격 재협상 실패가 결정타

샌드 플록하트 HSBC 아ㆍ태지역 회장은 "작년에 체결된 인수조건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HSBC 주주들의 최선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19일 말했다. 지난해 9월 론스타와의 계약대로 외환은행 지분 51.02%를 60억1800만달러(약 6조원)에 사들이는 것(주당 가격은 1만7725원)은 HSBC 주주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란 얘기다.

HSBC는 당초 계약 종료 시점인 지난 4월 말 이후 론스타와 가격을 낮추는 협상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가 확산된 7월 말엔 인수단가를 주당 1만4000~1만5000원 수준으로 낮추자고 제안했으며 최근엔 1만2800원까지 떨어뜨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론스타는 매매단가를 조정할 수는 있지만 이처럼 큰 폭의 조정은 불가능하다고 HSBC에 최근 통보했으며 결국 계약은 HSBC에 의해 파기됐다.

◆다른 매물 찾는 듯

플록하트 회장은 또 "세계 금융시장이 전개되는 것을 미뤄보고 세계시장에서 자산가치의 상당한 변화를 감안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한국 외 다른 곳의 대형 금융회사 자산가치가 크게 떨어진 만큼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데 투입할 60억달러라면 다른 곳의 매물을 찾아보는 게 낫다는 판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HSBC가 세계 2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 인수에 관심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이후 모건스탠리도 M&A를 통한 회생을 모색하고 있으며 모건스탠리와의 M&A 파트너로 HSBC가 거론되고 있어서다. 17일 기준 모건스탠리의 시가총액은 240억달러로 지분 50%를 인수하는 데 120억달러면 된다. HSBC는 모건스탠리뿐 아니라 미국의 최대 저축대부조합인 워싱턴뮤추얼의 인수 후보로도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금융위 불투명도 배경

외국계 금융회사 일각에선 금융위원회 등 한국 정부도 HSBC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하는 데 원인을 제공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금융위는 지난해 12월 HSBC가 승인을 신청한 이후 법원 결정 전 검토 불가능→적극 검토→국민정서 감안→긍정 검토 등으로 시시각각 입장을 바꿔왔다. 최근 들어 HSBC에 인수승인 신청서를 새로 작성해 내도록 하는 등 긍정적인 사인을 냈지만 최종적으로 승인을 받는 시점은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금융위가 원칙 없이 국민정서를 지나치게 신경써 왔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금융위는 외환은행 헐값매각 1심 판결이 나올 즈음 승인을 내줄 것이라고 말해 왔지만 그때 가서 국민정서가 어떻게 형성될지 누가 아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HSBC에 적극적인 신호를 줬는데도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한 것이 괘씸하다는 반응이다. 김광수 금융위 금융서비스국장은 "적극적으로 노력했는데도 일방적으로 파기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의 다른 관계자는 "HSBC는 외환위기 이후 제일은행 서울은행 한미은행 등의 M&A와 관련해서도 장부만 들쳐보고 뒤돌아선 배신자"라며 "HSBC에 이번에 또 당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박준동/정재형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