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최근 '좌편향'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사실 이 논란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줄기차게 제기돼온 문제였지만,노 정권은 책임있는 자세로 해법을 강구하기를 거부했다. 하기야 권력을 잡은 정치 386이 좌편향 역사관에 함몰됐으니 합리적 수정보다는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언을 떠올릴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좌편향' 역사교과서들이 고쳐지지 않고 버티기를 고집해온 것도 그런 정권 차원의 보호막 덕분이었다. 그런 보호막이 벗겨지면서 급기야 논란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게 된 것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교과서 논란을 두고 단순히 좌파와 우파의 '문화전쟁' 정도로 치부하려는 시각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우리사회에서 불거지는 모든 쟁점을 좌우의 문제로만 가늠하고,그리하여 정론(正論)이나 진실이라는 것은 없고 다만 모든 것이 이해관계나 주관적인 가치체계에 따라 결정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갖는다면,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그런 느낌을 부추기는 유비적(類比的) 표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좌충우돌(左衝右突)'이니 '좌고우면(左顧右眄)'이란 말이 바로 그렇다. 이런 언어적 관행에서 좌가 있으면 우가 있게 마련이라는 식의 상대화 경향은 현저하다.

그러나 좌우라는 당파적 입장을 떠나 기본적인 가치를 주장해야 할 때도 있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 좌파라고 해서 다르고 우파라고 해서 다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건국은 물론,산업화와 민주화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좌와 우에 따라 다르다면,국민적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히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배우는 역사교과서라면,'편향된 이야기'는 더 이상 곤란하고 오로지 사실에 입각한 '진실된 이야기'만이 들려져야 한다.

학생들이 건전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도덕적 가치관이 어디 있으며 또 우리 삶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올바로' 또 '정확하게' 인식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공동체는 주권과 영토,국민으로 이뤄진 실체다. 하지만 "국가란 영혼으로 존재한다"고 설파한 어니스트 르낭의 통찰에 우리는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영혼으로 존재하는 국가공동체의 역사는 국민들에게 자존감과 정체성 및 정신적 뿌리를 제공한다. 국민으로서의 한 개인은 국가의 영혼에서 도덕적 정체성을 추구하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한다. 바로 이것이 역사교과서에서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이념과잉의 덧칠없이 올바로 기록돼야 할 이유다.

국가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피땀 흘리며 일궈온 수많은 기념비적 사건 가운데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새로운 세대들에게 전해주는 '기억의 사회화'야말로 교과서의 주된 기능일 터이다. 유감스러운 일은 지금 한국사회의 역사교과서에는 '진실에 입각한 기억의 사회화'보다는 '편향된 기억의 정치화'가 현저하다는 점이다.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않게 만들고 또 왜곡된 사실과 잘못된 사관(史觀)을 학생들이 외우고 시험쳐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기억의 정치화'다. 또 이념에 과잉 경도된 나머지 역사적 사실들을 마치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듯 임의적으로 교과서에 취사선택해서 실었다면,그것도 '기억의 정치화'다.

그동안 학생들이 좌편향의 내용을 대거 배운 것을 생각하면 만시지탄의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한 국가공동체 내에서 공유해야 할 도덕적 가치나 국민의 정체성을 역사의 어떤 부분에서 찾을 것인지,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