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빅3' 조선업체들의 자본 규모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이미 부분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고 현대중공업도 올 들어서만 자본 규모가 2조원 가까이 감소했다. 최근 매각작업이 한창인 대우조선해양은 이달 안에 대차대조표 상의 '자본총계'가 바닥을 드러내 '완전 자본잠식'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사상 최대 호황이라는 조선업계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전문가들은 수주산업이라는 조선업의 특성으로 인해 생긴 '회계상의 착시'라고 설명한다. 아직 손에 쥐지 않은 수주금액까지 환 헤지 하는 바람에 외환부문 평가손실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것.사전적 의미의 '자본잠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줄어드는 조선업체 자본
대우조선해양의 지난 6월 말 기준 자본총계는 6274억원.납입자본금(9619억원)에 비해 3000억원 이상 적다. 대차대조표상 숫자만을 놓고 보면 '자본잠식(납입자본금에 비해 자본총계가 적은 상태)'이 분명하다. 대우조선해양의 자본총계는 △2005년 1조4412억원 △2006년 1조6034억원 △2007년 1조7684억원 등으로 꾸준히 늘다가 올 들어 푹 꺼져 버렸다. 삼성중공업도 마찬가지다. 작년 말 1조8099억원에 달했던 자본총계는 지난 6월 말 9463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삼성중공업의 납입자본금이 1조1549억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2000억원가량 자본이 잠식된 셈이다. 현대중공업도 올 들어 6개월 동안 자본 총계가 1조9000여억원 쪼그라들었다.
◆회계기준을 따르다 보니
조선업은 수주산업이다. 미리 주문을 받고 선박 건조대금은 배를 인도하는 시점까지 다섯 차례 정도에 걸쳐 나눠 받는다. 조선업체들은 앞으로 받을 달러 대금이 환변동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문을 따내는 순간 선물을 통해 미리 달러를 매도하는 계약을 맺는다. 이런 구조 때문에 환율이 오를 때마다 평가손실이 발생하고 이는 자본을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조선업체 관계자는 "호황으로 수주액이 많을수록 자본이 더 크게 줄어드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 같은 평가손이 실질적인 자본 감소와는 무관하다는 것.현재 평가손이 나 있는 수주금액이 미래에 통장으로 실제 입금됐을 때에는 반대로 외환이익이 발생해 평가손이 난 만큼 고스란히 자본을 불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조선업체가 환 헤지에만 충실했을 경우에는 환율로 인한 평가손은 결국 외환이익을 통해 거의 100% 상쇄되는 셈이다.
물론 수주대금의 일부를 투기적인 거래에 투입하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올 상반기 중 외환 파생상품의 하나인 키코(KIKO)로 인해 1400억원가량의 손실을 입은 대우조선해양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 회사는 앞으로도 수백억원 수준의 추가적인 환차손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일정 부분 실제 환차손이 나긴 했지만 매출이나 수주액에 비해 큰 규모가 아니어서 '자본잠식'을 우려할 정도는 전혀 아니다"고 해명했다.
◆수주 많을수록 부채 비율 급등
국내 조선업체들은 이런 회계 구조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보고 있다. 외국 선주와 수주협상을 할 때 문제가 되거나 은행권에서 돈을 빌릴 때 차입금리를 높여 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선수금이 부채로 잡히는 회계기준도 골칫거리다.
요즘 같은 환율 상승기에 수주를 많이 쌓아 놓은 업체는 부채비율(부채/자본)이 급등하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선수금이 많아 분모인 부채는 커지고 외환 평가손이 발생해 분자인 자본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우조선해양의 부채비율은 작년 6월 말 307%에서 지난 6월 말에는 1573%로 뛰었다. 장사준 한국조선공업협회 경영지원부장은 "이런 회계상의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해 현재 회계법인에 의뢰해 개선방안을 찾고 있다"며 "이달 안에 개선안을 마련해 금융감독원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재석/장창민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