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자금 시장의 '달러 가뭄'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외화 자금난을 견디지 못한 은행들이 급기야 기업들에 대한 외화대출 회수에 이어 수출환어음 매입규모를 축소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금융회사의 외화 자금난이 수출기업 등 실물경제로 옮겨붙고 있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외화대출 회수와 수출환어음 매입 축소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은행들은 "외화 조달이 안 되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으며 외환당국이 달러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달러부족 수출기업으로 불똥

은행들은 기업들이 수출환어음 매입을 요청하면 일정액의 매입수수료(환가료)를 받는 대가로 수출대금을 미리 지급한다. 은행들이 수출환어음 매입을 축소하면 기업들은 당장 자금사정이 악화되고 이에 따라 외국으로부터 원자재를 구입하거나 외국산 설비를 사오지 못해 공장을 가동하는데 상당한 애로를 겪을 수 있다. 일각에선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업체마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설령 은행들이 수출환어음 매입을 직접 줄이지 않더라도 환가료를 올리면 기업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최근 외화조달 금리가 폭등하면서 환가료는 지난 1일 5.6% 선에서 25일에는 6.9%까지 치솟았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기업 외화대출 회수 등은 '비올 때 우산을 빼앗는 격"이라며 "은행들이 과도한 대출 회수를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들은 이에 대해 실물경제 타격을 우려하면서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외화대출을 줄이고 수출환어음 매입을 축소하면 수출업체의 어려움이 가중되겠지만 은행도 외화가 부족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은행 자금부장들은 지난 24일 금융감독 당국과의 대책회의에서 "외환당국의 달러 공급 확대가 절실하다"고 건의했다.

◆오버나이트 달러 차입도 힘들어

은행들이 수출환어음 매입 축소 등 초강수를 들고 나온 것은 그만큼 은행 자체의 외화자금 사정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은행권 내에선 "달러자금이 씨가 말랐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특히 최근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중장기 외화자금 시장뿐 아니라 단기자금 시장에서 차입은 사실상 중단됐다. 모 은행 자금담당 임원은 "이번 주 들어서는 1개월물이나 1주일물은 고사하고 오버나이트(overnight·하루짜리 달러차입)마저도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며 "이 같은 상황이 언제쯤 해소될지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도 "리먼 사태 이후 1개월 이내 단기물은 구경도 못했다"며 "전 세계적으로 달러 거래가 단절됐다"고 말했다.

◆달러 기근 왜?

외화자금 시장이 얼어붙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올해 초부터 경상수지 적자와 글로벌 신용경색에 따른 외국인의 주식매도 등으로 외환시장에선 달러 부족이 일상화됐다. 특히 최근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으로 글로벌 유동성이 경색되고 있는 데다 미국 정부의 7000억달러 구제금융 방침이 의회 논의과정에서 지연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외화자금난이 더욱 심화됐다. 한국은행에 이어 정부가 외화스와프시장에 개입해 달러 공급을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한번 꼬인 외화자금사정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올들어 원.달러 환율이 900원대 초반에서 1160원대까지 치솟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지만 정부와 한은이 외환보유액을 무작정 풀어 달러 부족을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외환보유액은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라는 점에서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