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제시한 7000억달러 구제금융 계획의 의회통과가 불투명해지면서 국내 금융시장이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특히 채권시장에선 "크레디트물(credit物ㆍ회사채 은행채 등 비정부 채권)은 모두 위험하다"는 공포 심리가 퍼지면서 회사채(3년 만기 무보증 AA- 기준) 금리가 26일 하루 만에 0.19%포인트나 폭등(채권값 폭락)했다. 원ㆍ달러 환율은 4년여 만에 1160원대를 돌파했고,코스피지수는 1500선이 붕괴됐다.

◆금요일 오후의 '공습'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금융시장 분위기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주가가 약세를 보이기는 했어도 환율은 하락세를 보였고 채권금리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 계획,정부의 100억달러 이상 외국환평형기금 투입 발표 등으로 외화자금난이 완화될 것이란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오후 들어 상황이 돌변했다.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 처리를 위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민주ㆍ공화 양당 대선후보의 '백악관 3자 회동'에서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투자심리를 악화시켰다. 이에 따라 외국인이 국채선물을 4000계약(1계약=1억원) 가까이 내다팔며 채권값을 끌어내리자 채권금리가 동반 급등하기 시작했다. 결국 3년 만기 국고채는 0.08%포인트 오르며 연 6%를 뛰어넘었다. 특히 회사채 금리는 0.19%포인트나 폭등하며 연 7.85%까지 치솟았다. 2001년 5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그나마 이는 우량 등급인 'AA-' 기준이다.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이나 일부 대기업은 채권 발행 금리가 이보다 훨씬 높아 자금 조달 길이 사실상 막힌 상태다. 신동준 현대증권 채권분석팀장은 "크레디트물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며 "지금은 채권이고 뭐고 필요 없고 현금 확보가 최고라는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원ㆍ달러 환율도 점심시간 직후까지 1150원대에서 움직이던 것이 장막판 1165원대까지 치솟은 끝에 결국 1160원50전에 거래를 마쳤다. 김인근 ABN암로 이사는 "역내외 모두에서 '달러 매수'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며 "1200원 선까지 갈 기세"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진짜 위기 시작되나

전문가들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지적한다. 당장 국내 은행들은 '달러 기근'으로 외화자금난에 시달리고 있고 이를 견디지 못해 기업들에 대한 외화대출 회수와 수출환어음 축소에 나설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금융권의 외화자금난이 실물경제로 옮겨붙고 있는 것이다. 또 일부 증권사들은 파산보호를 신청한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관련 거래손실 우려로 콜자금을 빌리는 데 애를 먹는 등 원화 유동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정부가 이달 초 '9월 위기설은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시장에선 오히려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투자자들이 채권마저 못 믿겠다고 아우성치고 환율까지 계속 뛰는 것은 글로벌 신용경색이 국내에 본격 상륙하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며 "정부가 보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최근 금융시장 혼란이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이 아닌 미국 금융 위기에서 비롯돼 우리가 대처할 방법이 마땅찮다는 것이다. 결국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 금융시장이 안정되지 않으면 국내 금융시장 불안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안이 당초보다 축소되면 금융시장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그 결과 국내 금융시장의 유동성도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