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30) 윤도장 전수관 ‥ 통일신라시대 '전통 나침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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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는 집터와 묘자리를 잘 쓰면
가문이 번성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이른바 풍수지리 사상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해서
뒤로는 산이나 언덕을 등지고
앞으로는 강 개울 연못 등이 놓여 있어야
산에서 내려온 지기(地氣)가 잘 보존된다는 것.
여기에다가 주산(主山)과
이를 보좌하는 좌청룡(동쪽) 우백호(서쪽),
앞에 놓인 조그만 안산(案山)까지
조화를 이룬 곳을 천하의 명당이라고 부른다.
이런 명당 자리를 봐 주는 지관들이 갖고 다니는
필수품이 바로 윤도(輪圖)다.
풍수가를 위한 전통 나침반이다.
중앙의 나침반을 음양ㆍ오행ㆍ팔괘ㆍ십간ㆍ십이지를
뜻하는 한자가 최대 24개층의 동심원을 이루며
바퀴처럼 감싸고 있다.
바깥 동심원일수록 심오한 주역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지금은 9층 이상의 원리를 이해하는
풍수가의 명맥이 끊겨져 간다고 한다.
전북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마을은 정읍에서 고창으로 접어드는 길목의 언덕에 있다. 주위에 논이 넓고 큰물이 나도 침수되지 않아 예부터 먹을 거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곳이다. 낙산마을에서 만든 지남철(指南鐵ㆍ나침반)이어야만 제대로 지오(指午ㆍ정남향을 가리킴)한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 이유는 마을에서 남쪽으로 1.5㎞가량 떨어진 제성산에 전설의 거북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거북 바위의 등에 쇠붙이를 올려 놓으면 양 끝이 정남과 정북 방향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런 영향인지 풍수 사상이 등장했던 통일신라 시대부터 이 마을에선 윤도를 제작해 왔다고 전해진다. 기록에는 약 350년 전 전(全)씨 가문에서 한(韓)씨,서(徐)씨를 거쳐 현재의 김(金)씨 집안으로 윤도 제작 기술이 전승돼 왔다.
이 마을의 김종대씨(74)는 1996년 12월 중요 무형 문화재 110호인 윤도장(輪圖匠)으로 지정됐다. 자택 옆에 전통 공예물 제조업체이자 윤도 전시관을 겸한 윤도장 전수관을 세우고 조부인 고(故) 김권삼 옹,백부인 고 김정의 옹(1978년 작고)의 뒤를 이어 아들 김희수씨(46)로 4대째 가업을 이어 가고 있다. 고창군 성내면의 조선시대 지명은 흥덕현(興德縣).안성 하면 '유기(놋그릇)'를 떠올리듯 당시에는'흥덕' 하면 패철(佩鐵ㆍ나침반)이었다. 흥철(興鐵)이 나침반을 의미할 정도로 이 지역의 윤도 품질은 뛰어났다.
김종대 윤도장전수관 대표는 1962년부터 백부에게 윤도 제작 기술을 익혔다. 그렇지만 전업삼아 치밀하게 배운 것은 아니었다. "백부는 마치 비법을 간수하듯 윤도 만드는 기술을 전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건강이 나빠지자 '전통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느냐.네가 집안 중에서 가장 소질이 많으니 전수받아라'고 했죠.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세부적인 기술은 미처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1981년 다니던 농협을 그만둔 후 수년간에 걸쳐 스스로 연구한 끝에 끊길 뻔한 윤도의 맥을 가까스로 이을 수 있었습니다. "
윤도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어렵다. 무주 보은 단양 제천 등지에서 200~300년 된 대추나무나 회양목을 가져다 1년간 물에 담가 진을 뺀 다음 또 1년을 그늘에 말려 뒤틀림이 없게 한다. 이어 조각칼로 한자가 들어갈 위치를 구획하는 정간(定間)을 하고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콩알 만한 크기로 한 치의 오탈자가 없도록 한자를 새겨 나간다. 글자 배열이 가지런해야 하고 한 글자라도 잘못 새기면 판을 밀고 처음부터 다시 새겨야 한다. 통상 9층까지 파는 데는 열흘가량 걸리고 22층까지는 넉 달이나 소요된다고 한다. 김 대표는 "우리 집안은 지금도 젊어서는 안경 쓴 사람이 없을 정도로 눈이 좋은 편"이라며 "150W 스탠드를 세 개나 켜 놓고 글씨를 새기다 보면 덥기도 하고 눈알이 빠져나갈 것 같은데 백부는 한 층 조각하다 지치면 단소를 불며 여유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다 새겨지면 먹칠을 하고 음각된 글씨 부분을 백옥 가루로 메워 선명히 드러나게 한다. 현재 주로 쓰는 대추나무는 조각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치밀해 웬만한 충격이나 습기에 끄떡없고 설령 글씨가 흐릿해져도 다시 먹과 백옥을 바르면 되기 때문에 윤도는 깨지지 않는 한 수백 년 간다고 한다.
윤도장 전수관의 핵심 노하우는 정교한 바늘 제작 기법이다. 강철을 깎아 숯불로 단련한 후 초침처럼 가늘게 두드린다. 300년 넘게 가보로 내려오는 천연 자석 위에 세 시간가량 바늘을 올려 놓으면 강한 자성(磁性)이 옮겨지고 뾰족한 신주(구리와 주석의 합금) 위에 턱 얹어 놓으면 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해방 이전에 윤도장의 윤도는 지관뿐만 아니라 뱃사람도 많이 찾았다. 송광사 금산사 선운사 등 유명 사찰의 스님들도 절 자리와 신도들의 집터 풍수를 봐 주기 위해 다들 하나씩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조부와 백부가 윤도를 만들 때에는 삼남(영남ㆍ호남ㆍ충청)은 물론이고 이북에서도 흥철을 사 갔다"며 "당시에는 송아지 한 마리 값을 받을 정도로 고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풍수가들이 한 달에 한두 개 주문해 오는 9~10층짜리 윤도(100만~120만원 상당)를 만드는 데 그친다. 정부로부터 윤도장 보유자인 김 대표는 월 100만원,전수자인 희수씨는 월 50만원을 받고 이따금 풍수 시연회,전통공예 전시회에 참여하고 있으나 큰돈은 아니다. 김 대표는 "물려받은 전답과 농협에 다니던 시절 젖소 60마리를 키우며 모은 재산으로 나야 별 문제가 없지만 아들은 윤도 제작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우려했다.
고창=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
가문이 번성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이른바 풍수지리 사상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해서
뒤로는 산이나 언덕을 등지고
앞으로는 강 개울 연못 등이 놓여 있어야
산에서 내려온 지기(地氣)가 잘 보존된다는 것.
여기에다가 주산(主山)과
이를 보좌하는 좌청룡(동쪽) 우백호(서쪽),
앞에 놓인 조그만 안산(案山)까지
조화를 이룬 곳을 천하의 명당이라고 부른다.
이런 명당 자리를 봐 주는 지관들이 갖고 다니는
필수품이 바로 윤도(輪圖)다.
풍수가를 위한 전통 나침반이다.
중앙의 나침반을 음양ㆍ오행ㆍ팔괘ㆍ십간ㆍ십이지를
뜻하는 한자가 최대 24개층의 동심원을 이루며
바퀴처럼 감싸고 있다.
바깥 동심원일수록 심오한 주역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지금은 9층 이상의 원리를 이해하는
풍수가의 명맥이 끊겨져 간다고 한다.
전북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마을은 정읍에서 고창으로 접어드는 길목의 언덕에 있다. 주위에 논이 넓고 큰물이 나도 침수되지 않아 예부터 먹을 거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곳이다. 낙산마을에서 만든 지남철(指南鐵ㆍ나침반)이어야만 제대로 지오(指午ㆍ정남향을 가리킴)한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 이유는 마을에서 남쪽으로 1.5㎞가량 떨어진 제성산에 전설의 거북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거북 바위의 등에 쇠붙이를 올려 놓으면 양 끝이 정남과 정북 방향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런 영향인지 풍수 사상이 등장했던 통일신라 시대부터 이 마을에선 윤도를 제작해 왔다고 전해진다. 기록에는 약 350년 전 전(全)씨 가문에서 한(韓)씨,서(徐)씨를 거쳐 현재의 김(金)씨 집안으로 윤도 제작 기술이 전승돼 왔다.
이 마을의 김종대씨(74)는 1996년 12월 중요 무형 문화재 110호인 윤도장(輪圖匠)으로 지정됐다. 자택 옆에 전통 공예물 제조업체이자 윤도 전시관을 겸한 윤도장 전수관을 세우고 조부인 고(故) 김권삼 옹,백부인 고 김정의 옹(1978년 작고)의 뒤를 이어 아들 김희수씨(46)로 4대째 가업을 이어 가고 있다. 고창군 성내면의 조선시대 지명은 흥덕현(興德縣).안성 하면 '유기(놋그릇)'를 떠올리듯 당시에는'흥덕' 하면 패철(佩鐵ㆍ나침반)이었다. 흥철(興鐵)이 나침반을 의미할 정도로 이 지역의 윤도 품질은 뛰어났다.
김종대 윤도장전수관 대표는 1962년부터 백부에게 윤도 제작 기술을 익혔다. 그렇지만 전업삼아 치밀하게 배운 것은 아니었다. "백부는 마치 비법을 간수하듯 윤도 만드는 기술을 전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건강이 나빠지자 '전통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느냐.네가 집안 중에서 가장 소질이 많으니 전수받아라'고 했죠.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세부적인 기술은 미처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1981년 다니던 농협을 그만둔 후 수년간에 걸쳐 스스로 연구한 끝에 끊길 뻔한 윤도의 맥을 가까스로 이을 수 있었습니다. "
윤도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어렵다. 무주 보은 단양 제천 등지에서 200~300년 된 대추나무나 회양목을 가져다 1년간 물에 담가 진을 뺀 다음 또 1년을 그늘에 말려 뒤틀림이 없게 한다. 이어 조각칼로 한자가 들어갈 위치를 구획하는 정간(定間)을 하고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콩알 만한 크기로 한 치의 오탈자가 없도록 한자를 새겨 나간다. 글자 배열이 가지런해야 하고 한 글자라도 잘못 새기면 판을 밀고 처음부터 다시 새겨야 한다. 통상 9층까지 파는 데는 열흘가량 걸리고 22층까지는 넉 달이나 소요된다고 한다. 김 대표는 "우리 집안은 지금도 젊어서는 안경 쓴 사람이 없을 정도로 눈이 좋은 편"이라며 "150W 스탠드를 세 개나 켜 놓고 글씨를 새기다 보면 덥기도 하고 눈알이 빠져나갈 것 같은데 백부는 한 층 조각하다 지치면 단소를 불며 여유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다 새겨지면 먹칠을 하고 음각된 글씨 부분을 백옥 가루로 메워 선명히 드러나게 한다. 현재 주로 쓰는 대추나무는 조각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치밀해 웬만한 충격이나 습기에 끄떡없고 설령 글씨가 흐릿해져도 다시 먹과 백옥을 바르면 되기 때문에 윤도는 깨지지 않는 한 수백 년 간다고 한다.
윤도장 전수관의 핵심 노하우는 정교한 바늘 제작 기법이다. 강철을 깎아 숯불로 단련한 후 초침처럼 가늘게 두드린다. 300년 넘게 가보로 내려오는 천연 자석 위에 세 시간가량 바늘을 올려 놓으면 강한 자성(磁性)이 옮겨지고 뾰족한 신주(구리와 주석의 합금) 위에 턱 얹어 놓으면 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해방 이전에 윤도장의 윤도는 지관뿐만 아니라 뱃사람도 많이 찾았다. 송광사 금산사 선운사 등 유명 사찰의 스님들도 절 자리와 신도들의 집터 풍수를 봐 주기 위해 다들 하나씩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조부와 백부가 윤도를 만들 때에는 삼남(영남ㆍ호남ㆍ충청)은 물론이고 이북에서도 흥철을 사 갔다"며 "당시에는 송아지 한 마리 값을 받을 정도로 고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풍수가들이 한 달에 한두 개 주문해 오는 9~10층짜리 윤도(100만~120만원 상당)를 만드는 데 그친다. 정부로부터 윤도장 보유자인 김 대표는 월 100만원,전수자인 희수씨는 월 50만원을 받고 이따금 풍수 시연회,전통공예 전시회에 참여하고 있으나 큰돈은 아니다. 김 대표는 "물려받은 전답과 농협에 다니던 시절 젖소 60마리를 키우며 모은 재산으로 나야 별 문제가 없지만 아들은 윤도 제작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우려했다.
고창=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