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여성의 억눌린 삶…편지로 시작된 연쇄살인...훈민정음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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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을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지던 1448년,구중심궐 자선당에서 어린 궁녀 여영이 나신으로 죽은 채 발견된다. 그런데 여영의 옷가지에서 나온 서찰이 기괴하다.
이 서찰에는 '나 세자빈 봉씨는 원하노니,앞으로 남자의 자리에 여자들이 앉게 할 것이로다. 아니 여자와 남자를 바꾸어놓게 되리라.한을 풀어주지 않으면,여자들이 죽어간 숫자만큼 남자들이 죽어가게 될 것이로다. 차례차례 죽어갈 것이로다'라고 적혀 있었다.
서찰을 쓴 자로 추정되는 봉씨는 나인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폐서인되어 한참 전에 죽은 인물이니 서찰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무시무시한 한이 서려 있는 서찰의 저주 탓인가. 훈민정음을 널리 쓸 방안을 찾으라는 책문이 출제된 과거 급제자들을 초기 희생자로 삼아 연쇄살인이 시작된다.
소설가 김다은씨의 신작 장편소설 <훈민정음의 비밀>(생각의나무)은 정체불명의 서찰과 범인을 알 수 없는 연쇄살인이 맞물려 돌아가는 역사 추리소설이다. 형식도 특이하다. 서찰이 소설의 물꼬를 트고,소설 전체가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서신들로 구성돼 있다.
서간체 소설인 <이상한 연애편지>를 발표하고 <작가들의 연애편지> 등 서간집을 발간하며 서간문학에 큰 관심을 보여온 김씨는 "서간문학이 정착할 때까지 꾸준히 서간체 소설을 시도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훈민정음의 비밀>은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보다 궁에서 억눌리며 살아온 여성들의 속살거림에 더 집중한다. 가슴도 채 나오지 않은 어린 궁녀는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열녀전을 읽으면서 불쾌하다고 토로한다. 나이든 궁녀들은 같은 여성들끼리 나누었던 사랑행위를 떠올리며 "우리는 남녀처럼 교합하기 이전에 자신의 몸 위에 다른 한 인간의 몸을 싣고 있다는 것자체가 감격이었네.그 무게감 때문에 불안정했던 영혼과 육체가 바닥에 조용히 내려앉던 체험을 하지 않았나"라며 "그 아름답고 눈물겨운 체험이 지극히 추악한 일이라니…"라고 한탄한다.
유교적 관습에 허덕대던 궁녀들의 속내는 봉씨가 주도했던 자선당 모임의 실체와 봉씨가 궁에서 쫓겨나야 했던 이유가 밝혀지면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궁궐 여성들이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표현방법을 통해 억울함을 토로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이 서찰에는 '나 세자빈 봉씨는 원하노니,앞으로 남자의 자리에 여자들이 앉게 할 것이로다. 아니 여자와 남자를 바꾸어놓게 되리라.한을 풀어주지 않으면,여자들이 죽어간 숫자만큼 남자들이 죽어가게 될 것이로다. 차례차례 죽어갈 것이로다'라고 적혀 있었다.
서찰을 쓴 자로 추정되는 봉씨는 나인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폐서인되어 한참 전에 죽은 인물이니 서찰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무시무시한 한이 서려 있는 서찰의 저주 탓인가. 훈민정음을 널리 쓸 방안을 찾으라는 책문이 출제된 과거 급제자들을 초기 희생자로 삼아 연쇄살인이 시작된다.
소설가 김다은씨의 신작 장편소설 <훈민정음의 비밀>(생각의나무)은 정체불명의 서찰과 범인을 알 수 없는 연쇄살인이 맞물려 돌아가는 역사 추리소설이다. 형식도 특이하다. 서찰이 소설의 물꼬를 트고,소설 전체가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서신들로 구성돼 있다.
서간체 소설인 <이상한 연애편지>를 발표하고 <작가들의 연애편지> 등 서간집을 발간하며 서간문학에 큰 관심을 보여온 김씨는 "서간문학이 정착할 때까지 꾸준히 서간체 소설을 시도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훈민정음의 비밀>은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보다 궁에서 억눌리며 살아온 여성들의 속살거림에 더 집중한다. 가슴도 채 나오지 않은 어린 궁녀는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열녀전을 읽으면서 불쾌하다고 토로한다. 나이든 궁녀들은 같은 여성들끼리 나누었던 사랑행위를 떠올리며 "우리는 남녀처럼 교합하기 이전에 자신의 몸 위에 다른 한 인간의 몸을 싣고 있다는 것자체가 감격이었네.그 무게감 때문에 불안정했던 영혼과 육체가 바닥에 조용히 내려앉던 체험을 하지 않았나"라며 "그 아름답고 눈물겨운 체험이 지극히 추악한 일이라니…"라고 한탄한다.
유교적 관습에 허덕대던 궁녀들의 속내는 봉씨가 주도했던 자선당 모임의 실체와 봉씨가 궁에서 쫓겨나야 했던 이유가 밝혀지면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궁궐 여성들이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표현방법을 통해 억울함을 토로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