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경기든 반칙이 있게 마련입니다. 축구 경기의 경우 어떤 선수가 심한 반칙을 하면 주심이 레드카드를 꺼내 퇴장시킵니다. 내버려 두면 난장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증권시장은 어떤가요. 돈 놓고 돈 먹기라는데 반칙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축구와 달리 증시에서는 반칙이 좀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증권가 루머에 대해 딱히 반칙이라고 지목하긴 어렵지만 반칙성이 농후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A사가 보물선을 발견했다, B사가 자금난에 시달린다... 이런 근거 없는 루머가 왜 나오겠습니까. 누군가 이런 소문을 퍼뜨린 뒤 주식을 사거나 팔아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것은 아닐까요?

지난 3일 애플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브 잡스(53)가 심장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거짓 기사를 쓴 CNN ‘시민기자’에 대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조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주가를 떨어뜨리려고 의도적으로 거짓 기사를 올렸다면 누군가 부당하게 이득을 챙겼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건에 대해서는 파워블로거 김정남님이 어제 ‘인터넷 루머는 미국도 똑같았다’는 글을 블로거뉴스에 올려 널리 알려졌습니다. 미국에서는 논란이 분분합니다. 시민 저널리즘의 실패라느니 블로그가 문제라느니 말이 많습니다. 저는 SEC가 왜 이 건을 조사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만 얘기할까 합니다.

뉴스 채널 CNN은 아이리포트(iReport)라는 시민기자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누구든지 간단하게 등록만 하면 이 사이트에 기사를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금요일인 지난 3일 ‘Johntw’란 사람이 스티브 잡스가 심장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내용의 기사를 이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몇 시간 전 심장병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다. 내부자가 알려준 얘기인데 스티브는 심한 가슴 압박과 호흡곤란을 호소했고 구급차를 불렀다. 소스(취재원)를 밝힐 수는 없지만 아주 믿을 만한(quite reliable) 사람이다.

이날 아침 애플 주가는 강보합세로 출발, 9시40분경 105.27달러까지 올랐는데 이 소식이 알려진 뒤 급반전해 9시52분경 95.41달러까지 곤두박질했습니다. 애플 측이 기사 내용을 부인하면서 회복됐지만 10여분만에 10%나 떨어졌다가 반등했으니 기사가 거짓이란 걸 미리 안 사람은 떼돈 벌었을 겁니다.

스티브 잡스의 건강악화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스티브 잡스는 지난 6월 공식석상에 바짝 마른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제 눈에도 청바지가 유난히 헐렁해 보였을 정도였습니다. 며칠 뒤 신문에는 스티브 잡스가 1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말랐다며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때부터 심심하면 한 번씩 스티브 잡스 건강악화설이 나돌았습니다. 급기야 8월28일에는 경제통신 블룸버그가 스티브 잡스 부고를 내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블룸버그는 파일을 업데이트 하다가 실수로 기사가 나갔다고 해명했지만 천하의 블룸버그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제품 디자인이나 마케팅을 직접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이팟이나 아이폰에 대해서도 잡스가 아니면 과연 그런 혁신적인 제품이 나왔겠느냐고 말합니다. 증권가 전문가 중에는 애플 주가의 25% 가량은 CEO 프리미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에서 물러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가에서 CEO 프리미엄이 단숨에 빠지겠죠. 그런데 잡스는 4년 전인 2004년 췌장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고 지난 6월엔 바짝 마른 모습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났습니다. 잡스 건강악화설이 증시에서 ‘재료’가 될 수 있는 여건이 무르익은 겁니다.

CNN 시민기자가 의도를 갖고 기사를 썼는지는 조사를 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SEC가 조사를 시작한 것은 반칙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작전’에 이용됐을 수 있다는 겁니다. 블로그가 보편화돼 누구든지 블로고스피어에 기사를 올릴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유형의 반칙 가능성은 매우 커졌습니다.

저는 20년 전 기계업계를 출입할 때 생애 최대의 오보를 썼습니다. 경기침체로 사출기 업체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있다는 기사였는데 10여개 부도기업 명단에 부도나지 않은 업체 하나가 포함된 겁니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 이 회사는 자금줄이 끊기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부도 위기에 몰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때 수출자유지역 취재하러 마산에 가 있었습니다. 취재를 끝내고 회사로 전화를 걸었더니 난리더군요. “너 있는 곳 대란다. 당장 내려가서 모가지를 분지르겠대.” 결국 선배가 그 회사 찾아가 사죄를 하고 정정보도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됐는데 저는 그때부터 부도 기사 쓸 때는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실수로 오보를 쓴 경우에도 이 정도인데 의도적으로 오보를 쓴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보 날린 다음에 누군가 부당하게 이득을 챙긴다면? 당근 퇴장시켜야겠죠. 최진실씨 사망 후 증권가 찌라시를 조사할 거란 얘기가 있던데 이젠 우리도 찌라시 가지고 장난치고 근거없는 소문에 휘둘리는 수준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한경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