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글로벌 무대로 도약 노려

증권 자통법 시행 성장 계기로

보험 외국계에 내준 '失地' 회복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 금융산업에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0년 전 외환위기라는 암초를 맞아 비틀거렸지만 그동안 체질을 강화한 결과 이제 국내 금융산업은 외국이 주목하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지금은 파산보호를 신청한 미국의 4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산업은행에 인수를 요청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산은은 지난 7∼8월 리먼 측과 깊숙한 논의를 진행,인수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리먼은 산은에 SOS(구조요청)를 보내기 전 한국투자공사(KIC)와 하나금융을 먼저 찾아 자금투입 의사를 타진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KIC와 하나금융은 미국 3위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각각 20억달러와 5000만달러를 투입,주식을 갖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지난달 발표한대로 메릴린치 주식을 BOA 주식으로 바꿔주면 KIC와 하나금융은 BOA의 주주가 된다.

한국이라는 글로벌 금융무대의 '변방'이 이제 빠른 속도로 중심부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부정적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산은이 리먼 인수를 추진했던 것을 놓고 한국의 리스크를 증대시키는 행위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산은이 리먼을 굿뱅크와 배드뱅크로 분할한 뒤 굿뱅크 인수를 추진했었다는 차원에서 시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 금융계의 지배적인 기류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은 "최근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화는 우리 금융산업이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하고 있다.

국내 은행들은 '글로벌화'를 핵심 과제로 설정하고 항해를 거듭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지난 8월 카자흐스탄의 현지은행 BCC 지분 23%를 인수한 데 이어 향후 3년 내 지분율을 50%로 높여 경영권을 확보할 예정이다. 하나은행은 지난 7월 중국의 지린(吉林)은행 지분 20%가량을 인수,최대주주가 됐다. 하나은행은 지린은행을 동북3성을 공략하는 교두보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우리은행은 농협과 손잡고 홍콩 IB(투자은행)본부를 확대 개편하고 있다.

은행권 내에선 글로벌 은행으로의 도약을 위한 모델 연구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대체적으론 상업은행 또는 소매은행을 기반으로 투자은행을 접목한 상업·투자은행(CIB)이 현 단계 최선의 발전모델로 거론되고 있다. 외국계로 치면 미국의 JP모건체이스,독일의 도이체방크,스페인의 산탄데르은행 등이다.

보험업계와 증권·자산운용업계도 성장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보험업계는 우선 미국 AIG의 위기를 계기로 국내에서 '실지(失地)'회복에 나서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계 보험사가 빠르게 침투하면서 외국계 시장점유율이 20%에 육박하고 있으나 이제는 상황이 역전됐다는 판단이다. 보험사들은 특히 보험계 금융지주회사에 대한 각종 규제를 정부가 완화해 주기로 한 만큼 계열사를 잇따라 자회사로 편입,영토 확대를 꾀하고 있다.

증권업계는 내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의 시행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자통법은 금융투자회사로 인가받으면 은행의 예금이나 보험업계의 보험상품을 제외한 모든 금융상품을 설계·판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최근 미국 금융위기를 계기로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정부는 일단 허용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도 최근 "자통법을 금융산업 육성 차원에서 계획대로 시행한다"고 말했다.

김형태 증권연구원장은 "미국 IB가 부실화된 것은 한국에서 자통법을 시행하는 것과 전혀 맥락이 다른 사안"이라며 "미국 자본시장은 규제와 감독이 너무 취약해 문제가 된 것이고 한국의 자본시장은 너무 규제가 많아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권업계는 자통법으로 경쟁력을 쌓고 나면 최근 씨앗을 뿌려놓은 중국 동남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본격적인 투자은행 기업금융 업무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국내 금융산업이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려면 넘어야 하는 산도 적지 않다. 당장 가계금융,중소기업금융,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대출의 부실화 가능성이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 차원에서 해법을 내놓고 있지만 업계 공동의 노력이 진행되지 않고 각자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현재의 덩치로는 글로벌 무대에서 본격 경쟁하기엔 역부족이다. 국내 빅3 금융그룹인 우리 신한 KB금융의 자산 규모는 300조원에 불과하다. 글로벌 50위,아시아 10위권이 되려면 최소 600조원은 되어야 한다. 때문에 보다 치열한 인수합병(M&A)이 전개되어야 세계시장에서 한국 금융산업의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