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섬김통장 年6% 파격금리
상품개발팀서 90분만에 신속결정
출시 6개월만에 23만계좌 깜짝 유치


기업은행은 소비자금융 분야에서 최약체 은행이다. 대형 시중은행에 비해 지점 수와 고객 계좌 수가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이 은행의 상품개발팀은 최근 1~2년 사이에 다른 시중은행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참신한 상품들을 내놓으며 금융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업무시간이 한창인 지난 8일 오후 2시 서울 기업은행(IBK) 본점.진한섭 상품개발부 팀장이 내년 초 선보일 '빌딩 블록(Building Block)' 방식의 금융상품에 대해 팀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빌딩 블록 방식은 마치 건물의 블록을 쌓아가듯 고객의 니즈(needs:요구)에 맞게 금리ㆍ수수료ㆍ부가서비스 등을 자유롭게 조합해 상품을 만드는 것.금리를 탄력적으로 높이는 대신 교차상품의 옵션을 다양하게 걸자는 주장이 나오자 엄경호 차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반박한다. "옵션을 다양화해봤자 복잡하기만 하고 고객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간단한 슬로건으로 이 상품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안부터 고민해보자." 이때부터 팀장 차장 과장 대리 할 것 없이 난상토론을 벌이며 회의실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 시장 흐름 이용한 참신한 아이디어 상품 대박

상품개발팀의 올 최고 작품은 단연 '서민섬김통장'이다. 이 통장은 통상 고액 예치자에게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금융권 관행과 달리 서민들의 소액 예금에 파격적인 금리 우대 혜택을 제공하자는 '역발상'으로 탄생했다. 올해 4월1일 출시한 이 상품은 9월24일 현재 누적 수신액 4907억원,22만7318계좌를 기록하며 '창행 이래 최고 히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역발상은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서 비롯됐다. 타 은행보다 고객 기반이 턱없이 취약하다는 솔직한 자기 진단에서 시작된 것.권영만 차장은 "단기적으로 손해를 입는 '역마진'을 보더라도 효율적인 교차상품 설계와 고객관계관리(CRM)를 통해 고객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면 이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금융권에서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이것이 상품 설계로 이어질 때는 어김없이 금융공학이라는 첨단 지식이 동원됐다. 아이디어가 나온 지 불과 2개월반 만에 서민섬김통장이 출시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상품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출시 후 2주가 지난 올 4월15일.기업은행 A지점장의 제안이 상품개발팀에 접수됐다. 당초 상한선으로 정했던 연 5.4%대의 금리를 신규 고객에 한해 5.7% 선으로 높이자는 제안이었다. 상품 개발의 원래 취지였던 고객 확대를 위해서는 0.3%포인트의 추가 금리 지급이 필요하다는 것.

이때부터 상품개발팀의 기동력이 발휘됐다. A지점장이 긴급 타전을 한 시간은 오전 9시30분.상품의 최종 승인권을 갖고 있는 부행장과 상품개발팀이 머리를 맞댔다. 1시간30분이 지난 오전 11시,상품의 금리설계 변경 승인이 떨어졌다. 수천억원의 자산 이동이 90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황우용 과장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박리다매'라는 전통적 상거래원칙,그리고 금융공학과 빠른 의사 결정 과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기업은행의 최대 역작"이라고 자부했다.

▶▶ 역발상의 힘…본전도 못 찾을 상품이 효자상품으로

사실상 제로금리에 가까운 은행권의 수시입출금식 예금 대신 "하루만 맡겨도 ~%"라는 모토를 내건 종합금융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가 맹위를 떨치던 2007년.같은 해 2월 상품개발팀은 '증권사 CMA 대응상품 개발 검토안'을 은행장에게 올렸다. 예금 적금 등 전통적 금융상품에 대한 충성도가 급격히 무너지고 CMA로 자금 이동이 확대되면서 이를 만회할 상품이 절실하다는 내용이었다. 밤낮없이 외국 금융사 상품구조를 뒤지던 진 팀장은 울위치(Woolwich)사가 바클레이즈은행을 통해 판매하던 상품을 보고 책상을 쳤다. 은행의 전통적인 수익모델인 예대마진(예금과 대출금리 간 차익)을 탄력적으로 운용한 복합상품이었던 것.진 팀장은 예금과 대출의 '오프셋(offset:상쇄)' 개념을 적용한 상품인 'I-플랜 대한민국 힘통장'을 후속 보고서에 올렸다.

이 통장은 '300만원'을 초과하는 예금액에 대해 매일 최고 연 5%의 금리를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작년 8월13일 출시한 이 상품은 올해 9월24일 기준 5751억원,총 계좌 73만3064개를 유치하며 기업은행의 또 다른 히트상품으로 자리를 굳혔다. 현재는 예금기준액이 100만원까지 낮아졌다.

예대마진 극대화는커녕 본전도 못 찾을 가능성이 컸던 '모험'을 기획한 이유는 뭘까. 박희진 차장은 "업계에서 불리한 위치를 반전시키려는 역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타 은행은 급여통장 여신이 월 수조~십수조원에 이르는 데 비해 기업은행의 월 여신액은 1조여원 수준.어차피 타 은행과 경쟁이 안 될 바에야 경쟁의 틀 자체를 바꿔보자는 역발상이 먹힌 것이다.


▶▶ 첨단 금융 공학기법으로 진입장벽 만든다

I-플랜 급여통장의 히트 이후 경쟁 은행들은 모방상품을 쏟아냈다. 모 은행은 오히려 100만원 이하에 금리 혜택을 주는 상품까지 내놨다. 그러자 상품개발팀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타사가 도저히 모방하려고 해도 엄두를 못 낼 그런 상품은 없을까? 아이디어와 실행 능력만으로는 시장 선점효과가 있을 뿐 유사제품의 진입을 막지는 못한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진 팀장은 "우리 회사,우리 조직원들만 상품을 운용할 수 있게 만드는 정보기술(IT )시스템이 있다면 경쟁사들에 충분히 진입장벽을 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팀과 경영진의 결단에 따라 바뀌는 상품구조를 그때그때 변경할 수 있는 혁신적 시스템이 전제조건이다. 금융권은 이를 '차세대시스템'으로 정의하고 IBM 등 유수 외국 IT 컨설팅기업과 삼성SDS 등 시스템통합(SI) 기업을 통해 차세대시스템을 한창 구축 중이거나 구축을 완료했다. 진 팀장은 내부 회의 못지않게 SAS 오라클 IBM 등 IT 컨설팅기업 및 SI 기업 관계자들과 수시로 만난다. 사내 마케팅부,재무설계부는 물론 IT계정계 시스템 담당 직원들과도 항상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열어놓고 있다. 내·외부를 넘나드는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결국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이해성 기자/사진=김영우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