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들 "더이상 못버텨" … 금통위 금리인하에 실낱 기대

8일 오전 서울 명동의 외환은행 본점 딜링 룸.외환시장을 지켜보느라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딜러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전 9시49분 1353원이었던 원ㆍ달러 환율이 불과 7분 뒤인 56분 1366원으로 뛰어올랐다. 말 그대로 10분 만에 10원 넘게 오른 것이다.

세 시간 뒤 현대증권 영동지점.고객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의자에 기대 증권시세 모니터를 묵묵히 지켜보던 박승권 지점장의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미국 다우지수의 급락과 원ㆍ달러 환율의 상승에도 잘 버텨오던 코스피지수가 오후 1시를 지나면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코스피가 이내 1300 밑으로 맥없이 밀려나자 지점 객장 여기저기에서는 '악~'하는 고통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한 개인투자자는 "1300선마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며 "이제 와서 주식을 던지면 뭐 하냐"며 망연자실한 채 객장을 떠났다.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다며 주가와 관계없이 무조건 현금을 확보하려는 투자자들도 속출했다. 권순호 하이투자증권 부산중앙지점장은 "주가가 싸든 비싸든 상관 없으니 무조건 팔아달라는 '매도' 주문에다 원망 섞인 펀드 환매 문의 전화에 진땀을 빼야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권 지점장은 "다들 녹다운 상태다. 말 그대로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펀드 고객들로부터도 이젠 환매 문의가 많이 들어오며 원망도 많이 한다"고 말했다. 한 대형 증권사 팀장은 "특히 해외펀드는 이미 손실이 50%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국내 펀드도 20~30% 손실이 난 상태"라며 "개인투자자들은 9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를 인하할지에 마지막으로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외환딜러 두손 들어

이날 오전 9시 전날 종가보다 6원9전 높은 1335원으로 시작한 환율은 개장 1시간도 채 안돼 30원 이상 폭등하면서 시장을 패닉상태로 몰고 갔다. 오전 11시 가볍게 1380원을 찍은 환율은 1388원까지 거침없이 치고 올라갔다. 오버슈팅에 대한 경계감으로 매물이 쏟아지면서 1380원을 전후로 공방이 벌어졌지만 오후 2시 1390원이 깨지면서 1395원까지 쭉 밀렸다. 1998년 9월23일(1402원) 이후 10년1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루 상승폭만 66원90전으로 1998년 8월6일 이후 10년2개월 만의 최대폭이다. 최근 4거래일간 환율은 208원이나 올랐다.

통제선을 넘어선 외환시장을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리고 있다. "나올 악재는 다 나왔다. 조정 장세를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과 "분명 오버슈팅(과열양상)이지만 상승 압력이 식기는 어려울 것이다"는 상반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시장 붕괴상황이다. 전망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비관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다.

외환 딜러들은 외국인 주식투매와 경상수지 적자,글로벌 금융공황에 대한 불안감으로 달러 매집세가 폭주하면서 원화로부터의 '엑소더스'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우증권 고유선 이코노미스트는 "펀더멘털에 대한 차분한 분석을 하지 못하고 공포에 가까운 불안한 심리에 휘둘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동완 국제금융센터 상황정보실장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리보 금리가 급등하는 등 자금 경색이 워낙 심화돼 있어 외환시장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며 "서로가 상대방의 리스크를 믿지 못하는 극도의 불신이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증시 전망 의미없어

이날 국내 증시는 '사자'세가 자취를 감춘 가운데 외국인과 기관투자가의 매물로 '패닉'으로 치달았다. 코스피지수는 79.41포인트(5.81%) 급락한 1286.69에 마감했다. 이날 하락폭은 사상 여섯 번째였으며, 지수는 2006년 7월26일(1279.08)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코스닥지수도 30.48포인트(7.58%) 내린 371.47에 마감,2004년 12월 수준으로 돌아갔다.

불안하게 출발한 증시는 원ㆍ달러 환율이 천정 모르고 치솟으며 1400원 선에 근접한 데다 아시아 증시 폭락 소식이 전해지자 이내 공포 분위기로 바뀌었다. 인도네시아는 10% 이상 급락, 거래가 중단됐으며 일본 닛케이225평균주가와 대만 가권지수도 추락했다. 아이슬란드가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까지 더해져 아시아 증시 폭락 도미노는 한국으로까지 전해졌다.

조익재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마디로 돈이 꽉 막혀 있다"며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신용경색 상태로 어느 나라가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투매를 불렀다"고 말했다.

두산 금호석유 STX엔진 등이 하한가로 곤두박칠지는 가운데 유가증권시장 378개,코스닥시장 377개 등 모두 755개 종목이 52주 최저가 수준까지 빠졌다. 장중에는 한 대형 생명보험사에서 최근 유동성에 대한 우려감이 제기된 그룹의 주식을 무차별적으로 내던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전문가들은 시장 전망 자체가 의미없다고 얘기했다. 조 센터장은 "주식시장은 미 구제금융의 집행과 동시다발적인 금리인하에 달려 있다"며 "이 시점에서 지지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다.

김성주 대우증권 투자전략파트장은 "원·달러 환율이 안정돼야 하는데 국내 자체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G7(선진7개국) 재무장관 회담을 통해 강도 높은 정책공조가 이뤄져 글로벌 신용경색이 완화되는 게 급선무"라고 전망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책 마련도 주문했다. 서명석 동양종금증권 상무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시장"이라며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안정 대책만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심기/서정환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