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는 심판이 없잖아요. 플레이어 스스로가 심판으로서 결정하고 처리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닮았습니다. 46g의 하얀 공은 무리하지 않고,서두르지 않고,화내지 않고,자만하지 않고,벗들과 융화하며 마음을 비울 때만 말을 듣거든요. 심판없이 라운드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오감의 형태로 '폭로'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

1990년 추계예술대 교수직을 버리고 19년째 제주 서귀포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화가 이왈종씨(63)의 '골프론'이다.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점에서 개인전(14일~11월5일)을 갖는 그는 "골프와 인생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골퍼와 캐디,제주의 자연이 어우러진 필드에서 삶의 지혜를 배웠다"고 말했다.

골프 실력이 싱글수준인 작가는 필드를 배경으로 중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작품에 담아낸다. 퍼팅에 성공한 골퍼가 하늘 향해 웃는 모습은 승자의 희열을 뜻한다. 가끔 골프장에 등자하는 탱크는 '골프가 전쟁'이란 것을 암시한다. '중도'를 구현한 작가만의 해학과 풍자가 돋보인다.

왜 하필 골프 풍경을 그렸느냐는 질문에 작가는 "골프에는 자질구레한 감정 대신 오직 덩어리로 느낄 수 있는 야생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골프를 치는데 하루가 꼬박 걸립니다. 골프를 치면서 먹고 살게 없는가를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바로 골프 그림입니다. 골프와 인생을 같은 맥락에 놓고 대비하기를 좋아하구요. 인생과 골프는 같은 것일 수가 있어요. 특히 볼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플레이해야 한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

그의 작품은 붓질이 거침없으면서도 절제미를 보여준다. 밑그림도 없이 단숨에 그린 작품들은 그의 세계관이 화폭에 스며들어서인지 중도와 맞닿아있는 느낌을 준다.

"서귀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작업실에서 매일 8~20시간씩 제주의 청명한 햇살과 바람,파도를 애인처럼 끼고 중도의 세계를 색칠했어요. 그림은 섹스와 닮았나 봐요. 흥분과 즐거움이 있고 또 끝남의 허전함이 있더라구요. "

실제로 그의 그림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고 자동차,꽃,사슴,새 등 대상들이 사람과 한 화면 속에 어울려 뛰어놀고 있다. 표현기법도 종전의 원색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훨씬 부드러워졌다. 화면을 벽화처럼 희뿌연 분위기로 채색하고 표면을 긁어 제주의 정취와 풍광을 담아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대작 회화 외에도 목조각,소품,도자기 등 100여점을 만날 수 있다.(02)519-08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