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가 소설가로 변신한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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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가 위화의 첫번째 직업은 치과의사였다.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위생학교에 들어간 위화는 국가의 직업 배정에 따라 의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일터를 두고 '이빨가게'라고 불렀다. 그 이빨가게에서 보낸 세월은 위화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벌린 입으로 구성된 청춘'이자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였다. 직장 창가에서 '앞으로 평생 동안 이 거리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미래가 없다'는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는 위화.도통 일에 취미를 붙이지 못한 데다 정시 출ㆍ퇴근에 진력이 난 그는 비교적 자유롭고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현 문화관 사람들 대부분이 아주 나태하고 산만한 것이 내게 딱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에 아주 부지런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불경스럽게 고백한 그는 한 잡지사의 눈에 들어 '글쟁이' 인생을 시작한다. 소망했던 대로 문화관으로 근무처를 옮겨 오전 10시에 출근해도 별말이 없는 '천국의 일자리'를 얻은 건 물론이다.
<허삼관매혈기> <형제> 등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위화는 산문집 <영혼의 식사>(휴머니스트)에서 치과의사였던 자신이 왜 글쓰기를 시작했는지,자신에게 문학이란 무엇인지,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고 소소한 일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글을 써내려가다가 갑자기 아름다운 언어를 찾게 되면,이제까지의 지난했던 노동이 희열과 흥분으로 대체되면서 모든 원망을 순식간에 무화시켜버리고,붙박이처럼 앉아있는 것 자체가 무궁한 즐거움으로 바뀐다"며 "소설 속 인물들이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나는 명령을 내리는 서술자가 아닌 그들을 감사히 여기는 기록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한국방문기>라는 짧은 글에서는 번영한 한국의 모습,한국에서 만난 대중문화,광주민주화운동 묘역 방문 등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생후 6개월 된 아들이 동요를 더 좋아하는 통에 바흐 애호가로 키우려던 야심을 접어야 했던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사람들은 그의 일터를 두고 '이빨가게'라고 불렀다. 그 이빨가게에서 보낸 세월은 위화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벌린 입으로 구성된 청춘'이자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였다. 직장 창가에서 '앞으로 평생 동안 이 거리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미래가 없다'는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는 위화.도통 일에 취미를 붙이지 못한 데다 정시 출ㆍ퇴근에 진력이 난 그는 비교적 자유롭고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현 문화관 사람들 대부분이 아주 나태하고 산만한 것이 내게 딱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에 아주 부지런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불경스럽게 고백한 그는 한 잡지사의 눈에 들어 '글쟁이' 인생을 시작한다. 소망했던 대로 문화관으로 근무처를 옮겨 오전 10시에 출근해도 별말이 없는 '천국의 일자리'를 얻은 건 물론이다.
<허삼관매혈기> <형제> 등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위화는 산문집 <영혼의 식사>(휴머니스트)에서 치과의사였던 자신이 왜 글쓰기를 시작했는지,자신에게 문학이란 무엇인지,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고 소소한 일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글을 써내려가다가 갑자기 아름다운 언어를 찾게 되면,이제까지의 지난했던 노동이 희열과 흥분으로 대체되면서 모든 원망을 순식간에 무화시켜버리고,붙박이처럼 앉아있는 것 자체가 무궁한 즐거움으로 바뀐다"며 "소설 속 인물들이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나는 명령을 내리는 서술자가 아닌 그들을 감사히 여기는 기록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한국방문기>라는 짧은 글에서는 번영한 한국의 모습,한국에서 만난 대중문화,광주민주화운동 묘역 방문 등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생후 6개월 된 아들이 동요를 더 좋아하는 통에 바흐 애호가로 키우려던 야심을 접어야 했던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