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년 동안 인수합병(M&A) 전략은 삼성의 금기였다. 1995년 삼성전자의 AST리서치(미국 컴퓨터 업체) 인수가 참담한 실패로 끝난 이후 그룹 내 어느 누구도 M&A의 효용을 주창하지 못했다. 당시 충격을 받은 최도석 삼성전자 사장은 "동양계가 서구 기업을 인수해 언어와 문화 장벽을 뛰어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삼성이 내년부터 글로벌 M&A 추진을 공식화하고 나선 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우선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다.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해왔던 반도체·휴대폰·디스플레이 등의 사업은 과당 경쟁 또는 해외 경쟁사들의 집중적인 견제로 인해 예전만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정상급인 금융분야도 해외 무대에선 제대로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여건이다. 여기에다 이건희 전 회장의 갑작스런 퇴진과 전략기획실의 해체로 과거 삼성의 성공신화가 미래에도 이어질지에 물음표가 붙고 있는 실정이다. 인재와 기술 중심의 기존 전략에 M&A를 새로 추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최근 앞다퉈 세계 M&A 시장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일본과 중국계 기업들의 움직임을 마냥 방관할 수만은 없게 됐다.

삼성이 해외 M&A에 자신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1995년과 달리 그동안 경영의 글로벌화가 급진전됐기 때문이다. 외국인 임직원들이 크게 늘어났고 해외 지사와 법인들로 짜여진 글로벌 네트워크도 확대됐다. 또 확산일로에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헐값에 나오는 해외 기업들을 인수하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자금 측면에서도 삼성은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외국계 투자은행(IB)들은 삼성전자의 자본총계가 60조원에 육박하는 점에 비춰볼 때 유사시 자금조달 능력이 3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룹 전체로는 최대 50조원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은 이 같은 M&A 전략을 짜면서 내년도 주요 경영지표를 각 계열사에 제시했다. 우선 원·달러 환율 1040원은 지난해(925원)와 2006년(970원)에 비해서는 높은 수준이지만 최근 환율 수준보다는 크게 낮은 것이다. 최근 중견·중소기업들에 큰 부담을 안기고 있는 100엔당 원화의 환율은 원·달러 환율보다 더 큰 폭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삼성 관계자는 "현재 환율 수준보다 원화 시세를 높게 책정한 이유는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화 공급부족 현상이 조기에 해소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삼성이 내년도 국내외 경제상황을 그다지 비관하지 않는 것은 유가 전망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를 미리 반영해 폭락세를 보여온 유가는 오히려 반등을 시도할 것으로 삼성은 내다봤다. 우리나라가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 현물유가는 13일 배럴당 72달러까지 떨어졌으나 삼성은 내년 평균 유가를 93달러로 제시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