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리나는 전화를 받고 고객을 안내하는 일을 하면서도 퇴근 후 남아 다른 직원을 도울 일이 없는지 찾아봤다고 했다. 유니폼과 명찰,복사와 커피 심부름이 싫어 사표를 던졌던 내가 오버랩돼 번역작업 도중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런 일들이 업무의 본질이 아니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

칼리 피오리나 전(前) 휴렛 팩커드 회장의 자서전 '힘든 선택들'을 번역한 공경희씨의 후기 중 일부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정작 익히고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는데 시작도 못해보고 두 손 들었던 거구나. 회사 조직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몰랐던 내게 더 큰 문제가 있었구나. '

그런 다음 덧붙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려 했을 때 적어도 기업이 무엇을 하는 곳이며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았어야 했다. 비즈니스계에서 꿈을 갖고 도전해서 성취하려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더라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 공씨의 글은 취업 준비생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올 하반기 국내 500대 기업 신규 채용 규모는 2만명 미만.취업준비생과 실업자를 합친 20대 '청년 백수'는 100만명이 넘는 걸로 돼 있다. 이구백(20대 90%가 백수)이라는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닌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들 어떻게든 나은 조건으로 취업에 임해 보려 안간힘을 쓴다.

학점 세탁을 위해 졸업을 늦추고,토익 점수 향상은 물론 업무와 관련 없는 자격증까지 따느라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인다. 이른바 '스펙(specification·명세서,학력·학점·외국어 성적·자격증같은 조건)' 제고 경쟁인데 이로 인한 사회적 손실만 연간 2조85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그러나 조언하자면,학점과 토익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며,튀는 이력을 위한 자격증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취업에 필요한 건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닌 확실한 목표 설정과 그에 맞춘 구체적인 준비,과감한 도전,성실한 자세다. 한두 단계 높은 스펙보다 중시되는 건 젊음의 패기와 가능성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