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채 지급보증ㆍ기업어음 매입…꽉막힌 자금흐름에 숨통

미국이 골드만삭스 등 9개 금융사를 부분 국유화하는 '정공법 카드'를 빼내들었다. 금융위기를 하루속히 진정시키지 않으면 신용경색이 깊어져 실물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부분 국유화,은행채 지급보증과 중소기업 예금보장에다 부실자산 매입 구상을 더한 '스리 트랙(three-track)' 전략이다. 영국의 구제금융 방식을 따라한 이 같은 방침에 대해 시장은 "늦은 감이 있지만 환영할 만한 일"로 평가하고 있다.

◆부분 국유화 대상과 기대효과

미 재무부가 공적자금을 집중 투입해 주식을 사들이기로 한 9개 금융사는 씨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뉴욕멜론은행 스테이트스트리트 메릴린치 등으로 대부분 미국의 간판업체다. 이들은 최소 20억달러에서 최대 250억달러까지 총 1250억달러를 지원받는다. 나머지 1250억달러가 배정되는 중소형 금융사는 다음 달 14일까지 자율적으로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 있다.

미 정부가 굳이 대형 금융사를 반강제적으로 선택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중소형 금융사의 경우 자율신청에 맡긴 것은 공적자금이 투입되면 부실업체라는 인식이 퍼져 자칫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이 발생,상황이 더 꼬일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대형 금융사 중 일부가 재무구조 악화로 그동안 M&A(인수ㆍ합병)와 자본조달 등의 자구조치를 취해 왔지만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엔 아직 부족한 실정인 점도 고려됐다.

예를 들어 씨티그룹 분석에 따르면 JP모건체이스는 3분기엔 주당 32센트의 적자가 예상되고,32억달러의 충당금에 34억달러의 부실자산 추가 상각이 예상된다.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모건스탠리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두 계단 하향 조정했다. 일본 미쓰비시UFJ에서 90억달러의 자본 유치에도 불구하고 투자은행 사업부의 수익잠재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13일 오후 BOA JP모건체이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씨티그룹 뉴욕멜론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을 긴급히 만나 수정된 구제금융의 액션플랜(실행계획)을 설명하고,적극적인 참여를 설득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예금보험에 가입한 은행들의 부채에 지급보증을 서고,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곧 기업어음(CP) 직접 매입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와 관련,"위기 극복에 효과적인 조치"라며 "금융시장의 미래에 확신을 가져도 좋다"고 강조했다. 폴슨 재무장관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자금시장 경색을 해소하고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호히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서 "광범위한 초강수를 통해 금융권도 개혁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은 기업과 일반인에게 대출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부실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증권 등의 부실자산을 얼마나 떠안고 있는지 몰라 은행들끼리 서로 자금을 빌려줄 수도 없는 사정이었다. 자금 파이프라인이 꽉 막혔던 것이다. 이들 금융사가 자본을 대거 확충하면 재무건전성이 높아져 은행 간 상호신뢰가 회복되고 대출도 늘릴 수 있어 시중에 돈이 돌게 된다. 은행채를 지급 보장받으면 자체적인 자금조달 능력도 키울 수 있다. 금융사들은 주택 소유자들의 차압 방지를 위한 노력도 기울일 수 있다.

공적자금 직접 투입은 수주일의 준비기간이 소요되는 부실자산 매입에 비해 속도가 빠르다. 미 재무부는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를 매입하는 형식으로 구제금융을 투입하지만,경영진 보수와 황금낙하산(거액의 퇴직 보너스) 등은 제한할 방침이다. 미 정부는 2500억달러 외에 공적자금이 필요하면 대통령 결정 아래 1000억달러를 추가로 금융권에 지원할 방침이다. 더 긴급한 경우 3500억달러는 의회 결의를 거쳐 투입할 계획이다.

◆구제금융 방식 선회 이유

영국이 신속히 부분 국유화를 단행키로 선언하면서 위기대응에 나선 것과 달리 미국은 구제금융법이 발효된 지 10일이 지나서 동일한 방식을 선택했다. 양대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인수,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 파산보호신청,AIG 지원 등 교통정리에만 신경쓰다 보니 점점 악화되는 신용경색 현상을 놓쳐버린 꼴이다. 어수선한 대책이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구제금융 주무장관인 폴슨이 판단을 그르쳤다고 지적한다. 당초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부분 국유화를 강력히 주장했으나,폴슨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폴슨은 대신 은행 등 금융권에서 부실자산을 역경매 방식으로 매입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그런데 역경매 방식은 모기지 파생상품의 가치산정이 어려운 데다 시간이 걸린다는 비판도 많았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 민주당 지도부가 13일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 11명의 경제학자를 불러 자문을 구하면서 부분 국유화를 유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부분 국유화는 국유화하지 않은 은행들의 불안이 고조돼 역차별 논란이 일 수 있고,민간 자본이 유치될 경우 특혜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예금보호 한도를 25만달러로 상향 조정한 데 이어 은행채 지급보증,중소기업 은행예금도 보장키로 해 막대한 보증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