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

긴 침체의 터널 지금부터 시작

정부 신뢰회복이 위기 극복의 관건

미국과 유럽이 민간 상업은행들을 국유화하는 파천황(破天荒)적 돌파구를 찾고서야 겨우 금융위기가 진정되는 움직임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산에서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이념'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말하는 이유다. 물론 이번 위기로 인해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가 뿌리째 흔들리고는 있지만,폴 케네디의 말처럼 미국이 하룻밤 새 망하지 않을 것이고 달러의 위력이 쇠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과거의 대공황 때와는 달리 미국 중앙은행(FRB)이 금융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미국 금융위기가 시차없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지게 된 세계 각국의 얽히고 설킨 자본시장구조가 비상한 국면에 생존을 위해 서로 손잡는 국제공조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한 고비를 넘긴 데 불과할 뿐 위기는 계속 진행형이다. 금융시장 안정을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데다 당장 눈 앞에 불황의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 거품이 꺼진 금융시장에서 돈은 돌지 않게 되고,글로벌 수요감소에 따른 소비 생산 수출 투자위축으로 경제성장이 뒷걸음질 칠 것은 필연이다. 기업 도산과 구조조정,실업(失業)의 혹독한 겨울을 피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고통은 지금부터 시작인 것이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위기경영'을 말하고 있다. 모든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을 각오하고 있다는 의미다. 당장 내년 경영계획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하지만 아직 안개 속에서 제대로 된 방향조차 못 잡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어떻게든 버티자.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운 현실이지만 어쩌겠는가. 기업이든 개인이든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면 그래도 빛이 보인다는 희망을 갖고 미래를 준비해나가는 수밖에.

쌈짓돈을 주식시장에 밀어넣었던 투자자들의 서글픔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다. 속절없이 추락한 주가에 이젠 눈물마저 말라 버렸다. 한두 푼씩 모아 펀드에 들었더니 이미 원금이 반의 반토막 난 투자자들이 부지기수다. "말은 안 해도 속이 타들어 간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또다시 전문가들은 "주식이 충분히 싸졌다. 지금이 대박의 기회다"라고 주장하지만 이제 더 굴릴 돈이 없는 서민들에게는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사실 온갖 이론을 동원한 복잡한 분석으로 시장을 설명하는 전문가 집단에 유감이 없을 수 없다. 이 사태를 오래 전 족집게처럼 예견했다는 학자,전문가들이 속출하고 있지만,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 무슨 소용인가. 그들의 경고는 오늘의 이 위기에 대비하고 충격을 줄이는 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시장의 전문가들은 본시 별로 믿을 게 못 되는지 모른다. 조지 소로스는 "컴퓨터로 무장한 박사들의 현란한 금융기법이 만든 인위적 시장에 대한 믿음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리먼브러더스,베어스턴스의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신용평가기관들은 낌새도 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시장을 탓할 수는 없다. 시장은 어떤 상황과 여건에도 저절로 반응하고 스스로 살아남는 길을 찾아가는 아주 고등한 생물체나 다름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신뢰 회복이다. 이번 금융위기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어떤 수준의 형편없는 위기관리 능력을 보였는지,당국자들의 섣부른 말 한마디 한마디에 특히 외환시장이 어떻게 거꾸로 반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할 것도 없다. 정부에 대한 신뢰상실이야말로 시장 불안과 위기를 불러오는 화근이다. 위기가 수습되더라도 정부가 그 불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부터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