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에서 기차로 3시간30분 달려 도착한 바젤.한적한 중앙역에 내려 택시기사에게 "로슈(Roche)로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어떤 로슈 말이냐.바젤에는 수많은 로슈 건물이 있다"는 답이 되돌아온다. 조류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만드는 회사로 유명한 세계적인 제약회사 로슈.151개국에 8만여명의 인재를 거느린 신약개발의 선구자다. 로슈가 있는 바젤은 인구 50만명의 소도시다. 로슈는 이 도시에38개 건물을 갖고 있다. 가히 '로슈의 도시'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이 소도시에 있는 로슈가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바젤 본사 앞에서 만난 폴란드 출신 직원인 폴햄은 "창의성을 중시하는 HR(인재관리) 혁명 덕분"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섞어라, 잡종이 창의성을 낳는다
로슈의 바젤 본사 22동.당뇨병 암 등을 치료하기 위한 혁신적 맞춤형 신약인 '트랜슬레셔널 메디신(Translational Medicine)' 개발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약은 같은 질환이라도 환자에 따라 처방을 다르게 하는 꿈의 신약.먼저 개발하는 회사가 제약업계의 주도권을 잡을 것으로 평가되는 만큼 로슈도 이 약의 개발에 사운을 걸고 있다. 이날 회의 참석자는 15개 국적을 가진 20여명의 전문가들.회의를 마친 독일인 출신 라우라 세이츠 팀장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중국인 출신 과학자가 깜짝 놀랄만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며 "그가 제안한 환자세분화 방안은 신약 개발을 앞당기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환호했다.
물론 중국인 과학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제안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회사기밀이라고 손을 저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로슈가 맞춤형 환자 치료를 위한 환자세분화 작업에서 한 발 앞서 갈 수 있었던 것은 '잡종문화(cross-border)' 덕분"이라는 세이츠 팀장의 말을 들으면 상당한 성과가 있었음은 틀림없다. 다양한 국적과 사고방식,인품 등을 뒤섞는 잡종문화가 창의적 해결책을 가져온다는 얘기다.
◆놔둬라,다양성이 회사를 살린다
로슈의 잡종문화는 인재를 섞어 전혀 다른 '제3의 개체'로 탈바꿈시키는 게 아니다. 출신과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조직 및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로슈의 다양성 인정이 두드러진 성과로 연결된 건 표적 암치료제로 인기를 얻고 있는 '아바스틴(Avastin)'이다. 로슈는 2002년 미국의 바이오업체인 지넨텍(Genentech)의 지분 100%를 인수했다. 그러다가 곧바로 40%를 다시 되팔았다. 돈이 급했던 게 아니었다. 로슈가 100% 지분을 가질 경우 지넨텍 고유의 기업문화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전략은 적중했다. 바이오 벤처기업 특유의 실험정신을 유지한 지넨텍은 2004년 아바스틴이란 획기적인 항암제를 만들어 냈다. 아바스틴을 포함해 지넨텍이 개발한 신약은 로슈 매출액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없애라,잡무가 창의성을 좀 먹는다
잡종문화와 다양성 문화로 무장한 로슈.로슈는 인재들의 창의성을 보호하고 발굴하기 위해 올해 새로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다름 아닌 잡무를 없애는 것이다. 로슈의 최고경영자(CEO)인 프란츠 휴머는 "인재의 창의성을 살리는 것은 다름 아닌 잡무에서 인재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의지는 지난 3월부터 '모든 잡무 없애기'로 구체화돼 전 조직으로 확산되고 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이 HR부문.그동안 제약부문과 처방부문으로 이원화돼 있었던 HR 가이드라인을 하나로 통합했다. 세이츠 팀장은 "하나의 의사결정을 위해 700여개에 달했던 절차를 3분의 1가량으로 대폭 간소화했다"고 말했다. 인재의 창의성을 보호하고 발굴하기 위해서라면 웬만한 업무는 과감이 없애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로슈에 창의적 인재 보호는 회사 경쟁력 강화의 또 다른 말이다.
바젤(스위스)=성선화 기자 d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