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애도'에 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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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 문학ㆍ영화평론가 >
유명스타가 자살했다. 죽음은 사회적 사건이다.
유명인의 자살은 여파가 더 크다. 생물학적인 죽음이 운명과 관련된다면 사회적 의미에서 죽음은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빠의 매장을 두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던 '안티고네'만 해도 그렇다. 안티고네는 소포크레스가 쓴 그리스 비극의 제목이다. 주인공 안티고네는 두 오빠 중 한 사람에게만 매장을 허용한 왕에게 저항한다.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안티고네는 끝끝내 오빠를 땅에 묻는다. 결과는 참혹하다. 크레온 왕은 안티고네를 동굴에 산 채로 가둔다. 그러니까,안티고네를 산 채로 매장한 것이다.
안티고네 이야기의 특징이라면 누이인 안티고네가 오빠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죽음'이라는 문제를 두고 살려라,죽여라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 죽음을 처리하느냐에 자신의 목숨까지 건 것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이 자신의 오빠를 땅 위에 버려두는 게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의 법에 저항해 가족에 대한 윤리를 끝까지 지켜낸다.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이 단지 생물학적인 위협이나 종말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만큼이나 어떻게 죽음이 처리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다. 가령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팽형'이라는 처벌은 사회적 차원에서 죽음의 방식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팽형'은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을 물에 삶아 죽이는 방식의 처형을 가리킨다. 주시해야 할 것은 삶아내는 처형의 잔혹함이 아니다. 처형의 진행은 죄인이 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진짜 삶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그는 팽형을 당한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그래서 그는 평생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인 척 살아가야 한다. 산 죽음이라는 벌,사실 팽형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재환과 최진실을 비롯한 유명인의 죽음은 두 번씩 중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그들은 생물학적 죽음을 처리하는 모든 사회적 절차를 마쳤다. 의학적 절차인 부검까지 거쳐 이미 화장이 된 후 매장까지 이뤄졌다. 그런데 여전히 수많은 언론 매체와 인터넷 공간에서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돈다. 그들의 육신은 죽음과 조우했지만 아직 그들의 상징적 실체인 '이름'은 이 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두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애도와는 거리가 멀다. 프로이트의 말을 따르자면 애도는 리비도의 대상을 잃은 자아의 회복 방식이다.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거두어 대상을 잃은 슬픔을 회복해 가는 방식이 바로 애도인 것이다. 최진실과 얽혀 있다는 증권사 여직원에 대한 네티즌들의 행동들도 그런 점에서 애도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에 대한 애정을 증권사 여직원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증오조차 진정한 애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요즘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두 사람을 잃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애도라기보다는 그 죽음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유희처럼 보인다. 유희는 음모론이라는 이름으로 창궐하고 있다. 이 음모론은 애도하는 자들의 슬픔까지 공격할 만큼 잔혹하고 모질다.
최진실과 안재환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매우 현대적이다. 가설과 추측이 다수의 인과론과 마주칠 때 음모는 이론으로 굳어진다.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죽음에도 이유가 없다. 인과관계에 맞춰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들의 헛된 바람이다. 이제는 고인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무엇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유명스타가 자살했다. 죽음은 사회적 사건이다.
유명인의 자살은 여파가 더 크다. 생물학적인 죽음이 운명과 관련된다면 사회적 의미에서 죽음은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빠의 매장을 두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던 '안티고네'만 해도 그렇다. 안티고네는 소포크레스가 쓴 그리스 비극의 제목이다. 주인공 안티고네는 두 오빠 중 한 사람에게만 매장을 허용한 왕에게 저항한다.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안티고네는 끝끝내 오빠를 땅에 묻는다. 결과는 참혹하다. 크레온 왕은 안티고네를 동굴에 산 채로 가둔다. 그러니까,안티고네를 산 채로 매장한 것이다.
안티고네 이야기의 특징이라면 누이인 안티고네가 오빠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죽음'이라는 문제를 두고 살려라,죽여라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 죽음을 처리하느냐에 자신의 목숨까지 건 것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이 자신의 오빠를 땅 위에 버려두는 게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의 법에 저항해 가족에 대한 윤리를 끝까지 지켜낸다.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이 단지 생물학적인 위협이나 종말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만큼이나 어떻게 죽음이 처리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다. 가령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팽형'이라는 처벌은 사회적 차원에서 죽음의 방식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팽형'은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을 물에 삶아 죽이는 방식의 처형을 가리킨다. 주시해야 할 것은 삶아내는 처형의 잔혹함이 아니다. 처형의 진행은 죄인이 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진짜 삶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그는 팽형을 당한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그래서 그는 평생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인 척 살아가야 한다. 산 죽음이라는 벌,사실 팽형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재환과 최진실을 비롯한 유명인의 죽음은 두 번씩 중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그들은 생물학적 죽음을 처리하는 모든 사회적 절차를 마쳤다. 의학적 절차인 부검까지 거쳐 이미 화장이 된 후 매장까지 이뤄졌다. 그런데 여전히 수많은 언론 매체와 인터넷 공간에서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돈다. 그들의 육신은 죽음과 조우했지만 아직 그들의 상징적 실체인 '이름'은 이 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두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애도와는 거리가 멀다. 프로이트의 말을 따르자면 애도는 리비도의 대상을 잃은 자아의 회복 방식이다.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거두어 대상을 잃은 슬픔을 회복해 가는 방식이 바로 애도인 것이다. 최진실과 얽혀 있다는 증권사 여직원에 대한 네티즌들의 행동들도 그런 점에서 애도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에 대한 애정을 증권사 여직원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증오조차 진정한 애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요즘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두 사람을 잃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애도라기보다는 그 죽음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유희처럼 보인다. 유희는 음모론이라는 이름으로 창궐하고 있다. 이 음모론은 애도하는 자들의 슬픔까지 공격할 만큼 잔혹하고 모질다.
최진실과 안재환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매우 현대적이다. 가설과 추측이 다수의 인과론과 마주칠 때 음모는 이론으로 굳어진다.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죽음에도 이유가 없다. 인과관계에 맞춰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들의 헛된 바람이다. 이제는 고인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무엇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