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 용 <고려대 명예교수·경제학, 전 한국경제학회 회장>

경제이론도 모럴해저드 앞엔 '무용지물'

긴급상황선 신속한 정책집행이 더 중요

최근 금융위기 속에 경제학자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국민들에게 갈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는 경제학이나 경제정책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지적이다.

1930년대 초에 있었던 대공황은 당시 경제학자들에게는 생소한 경제현상으로 대처능력이 없었다. 생산능력이 있어도 수요가 부족하면 유휴생산시설과 실업이 증가하는 일종의 시장실패가 발생하는데 그에 대한 정책이 뚜렷하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케인스(1883~1946)라는 영국의 경제학자가 나와 총수요부족에 의한 거시적 경기침체의 가능성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제시해 소위 '뉴딜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의 이론은 경기불황이란 시장실패를 시장의 자생적 치유에 맡기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따라서 사회적 손실이 너무 커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때도 경제학자의 임무는 공황이란 시장실패가 발생한 이유와 대처방법을 제시하는데 그쳤고,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것은 정치인과 관료들의 몫이었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세계적 금융시장의 파동은 앞에서 지적한 대공황에 비해 몇 가지 불행중 다행인 점이 있다. 우선 이번의 금융대란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다 알려져 있다. 즉 상업은행(예금은행)들은 중앙은행의 철저한 규제와 감독 하에 수신 및 여신행위를 하게 돼 있고,예금자들을 보호하는 제도도 설정돼 있어 시장실패에 대한 예방조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투자은행은 규제가 허술해 엄청난 위험성이 내포된 금융상품과 파생상품들을 거래하며 수익성에만 치중한 나머지 불량주택채권 같은 위험자산에 많은 투자를 하다가 부실자산이 늘어 사태가 악화된 경우다. 결국 불완전한 규제,즉 정책실패가 야기한 위기이고 이를 시장의 자생적 치유에만 맡기기에는 사회적 손실이 너무 커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국제적 공조가 빠르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뿐만이 아니고 유럽연합(EU)권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도 미국과 같은 정책을 펴 공동대응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경제학자들보다는 정치인들과 정책집행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지금 국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외환시장의 왜곡현상도 불확실성에 대한 잘못된 대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번에 국내에서 문제가 된 키코(KIKO) 상품은 세계금융시장의 정보에 민감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에 정확한 시장정보를 제공하지 못한 것이 첫째 문제이고,또 그런 상품의 성격을 규제하지 못한 당국에 책임이 있으며,특히 정부가 외환시장에 너무 일찍 개입하는 듯한 신호를 준 데도 문제가 있었다. 정책의 입안과 집행자들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외환투기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정책책임자들의 자질과 능력이 중요하다. 또 중앙은행과 재정정책 부처 간의 협조도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 재무장관과 연방준비제도위원회 의장은 항상 함께 움직이는 듯하다. 정책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경제정책은 경제학자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국회와 같은 합의체의 결정이 필요하고,또 경제부처의 역할이 중요하다. 경제학자들의 임무는 과학적인 측면에서 분석결과를 제시해 의사결정에 참고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 이번과 같이 원인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진 상태에서는 다음 단계인 신속한 치유방법과 재발방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철저한 제도적 장치를 설정하는 것이며,따라서 이론적인 분석보다는 신속한 치유를 위한 정책입안과 집행을 담당하는 정치인과 정부책임자들의 역할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