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토지 매입 2조원,양도소득세율 인하,주택경기 활성화자금 3조6400억원 지원,양도소득세 비과세 요건 한시적 완화…."

이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7년 겨울 건설교통부가 내놓은 건설·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이다. 11년이 흐른 2008년 10월21일 정부는 '건설부문 유동성 지원 및 구조조정 방안내용'이라는 제목의 건설업계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내용은 이렇다. 기업토지 4조3000억원어치 매입,미분양 주택 2조원어치 매입,수도권 투기지역 선별 해제,미분양주택 펀드 조성,건설업체 브리지론 보증 등….1997년판의 복사본 같다.

'1997년본'과 다른 것이라곤 지원 방법이 세분화됐고,지원 규모가 더 커졌다는 점뿐이다. 정부는 이달 초까지만 해도 건설업계에 대한 직접 지원에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지난주 중반부터 갑자기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실물로 번지는 등 외생변수가 '발등의 불'이 됐기 때문이다. 급한 불을 꺼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지만 이번 대책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전문가들이 많다. 건설업계의 모럴해저드와 무기력한 위기대처 능력을 제대로 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풀려고 해서다. 전문가들은 "건설업체들은 업황이 나빠지면 항상 '공공공사 확대,미분양 대책 등을 내놓으라'고 엄살을 떤다"며 "국민의 혈세로 위기를 탈출하려는데도 불구하고 자구 노력은 뒷전"이라고 말한다. 과거 정부 5년 동안의 주택경기 활황 때 건설업계가 조금이라도 불황대비 경영을 했더라면 지금의 유동성 위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란 뼈아픈 분석도 많다.

건설업계가 허약체질이 된 데는 위기마다 어김없이 '우산'을 씌워주는 정부 탓도 적지 않다. 그래서 다른 업계에선 "건설산업엔 정부 실패는 있어도 시장 실패는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정부는 매번 '서랍속 대책'을 꺼내는 걸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건설업계도 경영실패의 책임을 국민에게 돌리는 걸 반복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게 정부와 건설업계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국민의 의심을 푸는 길이다.

박영신 기자 ys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