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웃 보증금 없이 치료 인술 펼쳐

의료계 원로들 "돈 쓸줄 아는 女傑"

美MD앤더슨 만한 암센터 만들것



전북 군산 대야초등학교 1학년 때 모든 학생들이 두 손을 앞으로 나란히 하는데도 급장만은 맨 앞에서 한 손을 옆으로만 벌렸다. 급장은 지방고위관료의 딸로 남들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닐 때 혼자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말 잘하고 야무진 것으로 소문났던 소녀 '이길여'는 급장이 부러웠다. 3개월쯤 지나 친구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급장이 됐다. 부모님의 주목을 받기위해 반에서 1등을 했고 이후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한번 마음 먹은 것은 반드시 해냈던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이 22일로 재단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1958년 인천 중구 용동에 개원한 이길여 산부인과를 모태로 한 가천길재단은 반세기 만에 국내 굴지의 의료·교육·언론 공익재단으로 발돋움했다. 재단은 가천의과학대 길병원 경원대 경인일보 가천문화재단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 등으로 구성돼 있고,의대 산하 뇌과학연구소 및 이길여암당뇨연구원,경원대 산하 가천바이오나노연구원 등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195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이 회장은 이듬해 산부인과를 열었다. 수술비가 없어 치료를 미루는 이웃을 위해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환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가져다준 특산물이 수북이 쌓였다. 이 회장은 1978년 의료법인 길병원을 설립하면서 의료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적자를 감수하면서 철원 양평 백령도 등 의료 취약지역에 잇따라 병원을 설립해 의료계 인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87년 인천 남동구 구월동에 현재의 가천의대 길병원을 세우면서 의료계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이 회장은 의료뿐만 아니라 교육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95년에 운영난을 겪던 경기간호전문대(가천길대학 전신)를 인수했고 3년 후 가천의대를 개교했다. 2005년에는 가천의대와 가천길대학을 통합해 보건의료 특성화 종합대학인 가천의과학대학교를 출범시켰다. 이에 앞서 1999년에는 경원대와 경원전문대를 인수한 뒤 국내 10대 명문사학으로 진입하기 위한 청사진을 펼쳐나가고 있다. 이 회장은 "경원대에 세계 최고 학과 2개와 국내 최고 학과 3개(G2+N3)를 만들겠다"며 "이를 위해 바이오나노학과 학생들에겐 입학성적에 관계없이 4년간 학비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열정은 기초의학 발전으로도 뻗어나갔다. 2004년 당시 한국인으로 노벨상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평가를 받던 재미 과학자 조장희 박사를 영입,국내에서 처음으로 뇌과학연구소를 개원했으며 올해엔 이길여암당뇨연구원과 가천바이오나노연구원 등을 잇따라 설립했다.

이들 연구기관에 들어가는 데 투입된 돈은 자그마치 2000억원.수익성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기초의학 발전을 위해 거액을 투입한 데 대해 의료계 원로들은 '돈 쓸 줄 아는 여걸'이라는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이 회장은 이날 기념식에서 "반세기 동안 박애 봉사 애국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면서 "뇌질환 암 당뇨병 등 기초의학 분야에서 더 많은 인재를 키우고 자본을 투자해 첨단 의과학이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이 되도록 만드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애국"이라고 밝혔다. 그는 "뇌질환 암 당뇨병 연구에서 신약이나 첨단치료법 개발 등 구체적인 결실이 맺어지면 미국의 MD앤더슨암센터에 버금가는 가천메디컬리서치센터(가칭)를 인천과 경기의 경계지역에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