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개인적인 모임에서였다. 국가경쟁을 넘어 지역경쟁의 시대라며 설왕설래하던 중 수도권 규제 완화는 더 미룰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였는데 반대도 나왔다. 지방도 더불어 성장해야 한다는 균형발전론이었다. 주장과 반박이 오가다 급기야 "균형발전 논리는 이전 정부의 좌파들 이념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고,일순 분위기는 묘하게 굳어졌다. 토론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재치 있는(?) 반론으로 어색한 자리는 웃음으로 겨우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균형발전 주장을 펴온 한나라당 소속의 이완구 충남지사나 김범일 대구시장 같은 이야말로 좌파의 선봉대겠네."

과거식으로 하면,누군가를 향해 '빨갱이'라고 딱지붙이는 것은 논쟁의 끝이요 긴 싸움의 시작이다. 이렇듯 해묵은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만큼이나 '수보,꼴보'라고 턱없이 몰아세우는 것도 갈데까지 간 상황이다. 자기와 견해가 다르면 극우니 좌파니 하며 극한적 감정싸움을 반복해온 게 우리 현대사다. 이 대립에는 논리와 이성,인간적 여유가 깃들 여지가 없다. 상대방에 대한 무한 공격이라는 점은 더 큰 문제다. 당사자는 늘 객관적이라지만 감정적인 내 편과 네 편만 중시될 뿐이다. 대립전선의 중간에서 중재하는 합리주의자는 자칫 회색인으로 양쪽에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빛바랜 이념논쟁이 좀체 그치지 않아 걱정스럽다. 교과서 논란이나 특목중고 문제도 그렇고,지난 여름의 광복절·건국절 논쟁 역시 그랬다. 현대사박물관 건립과 같은 사안도 막상 추진에 들어가면 안에 담을 내용을 두고 유사한 갈등이 재연될 듯해 우려된다. 이런 색깔논쟁을 무마해나가기는커녕 교묘하게 자극하는 게 또 여야 정치권이다.

금융과 산업여건이 나쁘지 않다면,그래서 나라경제가 무난히 굴러간다면야 조금 시끄러운들 뭐가 대수겠는가. 다소간의 인식 차이가 정책경쟁으로 승화되고 유권자들은 선거에서 입맛대로 정책을 고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그러나 수도권 규제와 같은 실생활 문제에서조차 경제적·사회적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이념문제에 걸어 토론 자체를 막는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쌀 직불제 국정조사에 대한 우려도 그래서 나온다. 제도 개선으로 실사구시를 하지 못한다면,여야 간에 말꼬리나 잡는 그만그만한 국감장의 연장에 그친다면,증인채택문제처럼 준비단계에서부터 대립만 한다면 다급한 다른 민생법안 처리나 예산심의에 어떤 악영향이 미칠까.

경제위기에서 빨리 벗어나자면 여야와 노사,정부와 사회단체,정치권과 경제계가 신뢰점부터 넓혀나가야 한다. 지금 경제살리기보다 더 급한 과제가 있는가. 나라 밖에서 내 지갑의 가치가 한 해 만에 반토막 났다. 잘못하면 더 쪼그라들 지경이다. 나라를 지키는 게 국경선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10년 전에 처절하게 경험했는데 또 위기다. 그런데도 아직도 "경제가 좀 나빠졌기로서니…"라며 은근히 색깔논쟁을 유발한다면 무지하거나 무책임하다. 구름 같은 청년백수에다 늘어나는 실직 가장,강남 고시원의 묻지마 살인을 보라.굳이 경제난을 거론 않더라도 통합의 단계를 넘지 않고서는 선진국으로 갈 수도 없다. 시아파니,수니파니 하면서 지금도 노선다툼을 하는 중동이나 종족 간·종교 간 분쟁을 일삼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생만 봐도 그렇다. 싸우더라도 터널 밖 밝은 곳에 나갈 때까진 미루자.정치권이 이 점을 특별히 신경 쓰면 좋겠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