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BizⓝCEO 기획특별판 입니다 >


조선 기자재 회사에서 자금담당 간부로 일하는 고 모(54)씨는 최근 정부가 내놓은 키코(KIKO) 대책을 믿고 은행을 찾았다가 아연실색했다. 은행 담당자로부터 "본점으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으며, 지원이 언제 될지는 알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기 때문이다. 고 씨는 "키코 사태 이후 매일 금융 감독기관 등에서 실태를 조사받았지만 실질적 지원은 '강 건너 불구경'인 것 같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중견 주물업체 A사의 사장 최 모 씨는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올해 원자재가격 상승과 내수침체로 매출이 지난해보다 30% 가까이 줄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 4.8%로 은행에서 빌린 10억 원은 이자율이 8%대로 치솟아 자금난을 부추기고 있다. 최씨는 "요즘엔 이자 내기도 버겁다"며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유가에 이은 세계적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시중은행들이 금고를 걸어 잠그는 바람에 중소기업체들이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창업이나 경영안정을 위해 은행 자금을 수혈 받는 중소기업들이 최근 불어 닥친 금융 악재로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운영자금 융자는 고사하고 어음결제용 등 급전대출 협조요청마저 은행들이 손사래를 치고 있다. 절박한 기업들은 중소기업진흥공단 등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으나 정책자금도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사상 초유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불요불급한 사업부문을 서둘러 정리하는 대기업들의 모습은 중소기업들에겐 사치처럼 보인다. 중소기업들은 예고 없던 자금경색에 속수무책이다.

은행들을 원망할 수도 없다. 올해 말까지 만기로 돌아오는 은행 채 규모가 25조원인데 이에 대한 차환발행이 안되다 보니 7%를 상회하는 고금리로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등 한 푼이 금쪽같은 실정이다. 하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10%선이 무너질 전망이 우세한 상황에서 선뜻 중소기업 대출에 나설 수 있는 은행은 없다.

중소기업의 '돈맥경화' 현상은 통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은행대출이 막힌 중소기업들이 올 들어 8월까지 직접 금융에서 조달한 비용은 2조2486억 원인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4.6%나 감소한 것이다. 자금이 마르면서 중소기업 창업도 갈수록 꺾이고 있다. 지난 8월 신설법인 수는 3,713개로 전달의 5,006곳에 비해 25.8%나 줄었다.

중소기업에 대한 은행권의 대출이 큰 폭으로 줄면서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이 내년에는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23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한 '최근 경제 환경 변화에 대한 중소기업의 대응방안' 세미나에 주제발표자로 나선 조병선 기은경제연구소 소장은 "내년 은행권의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순증액은 24조5천억 원으로 올해 50조9천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해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은 내년에도 밝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 소장은 또 "금년 상반기에 설비투자를 실시한 중소제조업체 비율도 14.7%에 불과하다"며 "이는 전년 동기 17.6%보다 2.9%p 하락한 수준으로 중소제조업체들의 설비투자 부진이 심화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밝혔다. 조 소장은 "올 들어 중소제조업의 생산증가율이 1%대 이하로 하락해 최근 5년 기간 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의 채무상환능력도 2004년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며 "지난해 기준으로 중소기업의 32.4%는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곳곳에서 오랜 경기침체에 따른 내수부진과 고유가, 국제원자재 값 폭등, 요동치는 환율 등으로 중소기업의 줄도산 공포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꿋꿋한 기업도 있다. 불황을 이기는 중소기업들의 공통분모는 '기술혁신'이다. 아직도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악화되는 경영여건 속에서도 기술혁신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체 수의 99%, 고용의 88%를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9988'의 중소기업이 활력을 얻어야 우리 경제가 또 한 번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라마다 기업마다 사력을 다해 뛰는 기술전쟁시대. 한 손엔 신기술, 한 손엔 계약서를 움켜쥐고서 기술전쟁, 그 최일선에서 '경제첨병'을 자처하는 산업의 풀뿌리들이 우리의 자산인 것이다.

양승현 기자 yangs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