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 시인 >

밤이 길어지면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묵은 사진첩을 들춰보다가, 10년 전에 받았던 편지라도 다시 꺼내 읽으면서, 흐린 알등빛 아래 턱없이 커진 그림자와 함께 적적한 한때를 달래고 싶어진다. 차디찬 방처럼 썰렁하게 식어버린 원고지 빈칸에 불을 지피면서, 어느 먼 산중의 단단한 열매 하나와 열매를 얻으러 가는 산짐승 발자국과 속살이 벗겨져 나온 가지에 새겨진 산토끼 시린 이빨 자국에 관해 가슴 아파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내가 사랑하다 그만둔 것들, 내가 사랑하다 영 잊어버린 것들과 함께.

지금 생각해보니 가을밤이 내게는 하나의 검은 잉크병이었던 셈이다. 나는 만년필 가득 밤을 빨아들여 편지를 썼다. 펜촉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져 나오는 밤은 허튼 맹세가 되기도 했고, 부끄러운 고백이 되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향해 긴긴 편지를 쓰던 밤, 그를 향한 지극한 마음 하나로 내 몸속의 피는 유난히 불땀이 드센 모닥불처럼 활활거렸다.

그렇게 밤을 새워 쓴 편지를 품고 우체국까지 걸어가던 아침의 설렘을 아직 잊지 못한다. 나는 한 자루의 만년필이 되어 우체국까지 이어진 그 길이 마치 마무리하지 못한 문장의 마지막 한 줄이라도 된다는 듯이 또박또박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다. 나는 너에게로 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내 몸으로 직접 걸어보고 싶었다. 편지 한 장이 내게서 떠나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더 따라가서 배웅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 간절함이 한때는 영화 <일포스티노>에 나오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친구나 <야간비행>의 생텍쥐페리와 같은 우편배달부를 꿈꾸게 했을 것이다. 우편 배낭 가득 담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품고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주재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가끔씩 나는 글을 모르는 할머니께 '어머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아들의 편지를 읽어줄 것이고, 할머니 대신 아들에게 짧은 답신을 써줄 것이었다.

요즘 골목길이나 도로변에 세워진 우체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우편배달부가 왔다 갔을 시간도 아닌데, 어쩌다 편지라도 한 통 넣어주면 매번 툭, 하고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내겐 왜 내 가슴이 텅 비어 울리는 소리, 심장이 텅텅 빈 채 무엇인가 공허하게 사라져가는 소리로 들려오는 것일까.

전자우편에 익숙해지면서 밤을 새워 편지를 쓰던 날들의 열망은 사라져버렸으며, 우편배달부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경험도 이제 더는 맛볼 수 없다. 어쩌다 반가운 소식을 받더라도 편지지 속에 담겨온 그 사람만의 고유한 필체와 한 자 한 자를 꾹꾹 눌러서 식자할 때의 힘과 글자 모양 속에 은밀하게 숨어 흐르는 호흡을 느낄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편지지 뒷면을 만지면 점자처럼 오돌토돌하게 만져지던 글자들, 나는 그 글자들을 통해 편지지 앞에 앉았던 그만의 내밀한 시간과 공간을 아슴푸레하게나마 만져볼 수 있었다. 내게로 건너온 그 시간과 공간을 더듬다 보면 어느새 내 가슴의 양피지 위에도 그 글자들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문재, <푸른 곰팡이> 중). 시인의 말대로 신호등의 붉은 등처럼 우체통이 보내오던 경고를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닐까. 천덕꾸러기처럼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우체통 앞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호명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