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아직 여름 볕의 따가움에서 헤어 나지 못하고 있는데 계절은 어느새 서늘한 바람을 벗 삼아 저만치 앞서 달리고 있다. 쌀쌀해진 바람은 그윽한 커피향을 그립게 하고,한줄기 가랑비에 촉촉이 젖어든 감성을 하염없이 배회하게 만든다. 전쟁같은 일상속에 문득 찾아온 호주 멜버른으로의 초대장이 반갑기만하다. 멜버른은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여행자의 몸 또한 여름 볕의 언저리를 서성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속살을 드러내는 게 쑥스러워서일까. 시드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광정보가 적은 멜버른.그래서 더욱 감질나고 설렘이 불꽃처럼 터져 오른다.

■낭만 가득한 도심

시드니를 거쳐 13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멜버른 국제공항.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코끝을 기분좋게 쓰다듬는 산들바람,그리고 피부 깊숙이 파고드는 상쾌한 공기가 여행자를 마중나와 있다. 장시간의 비행 피로를 그들에게 살포시 건네고 공항을 벗어나 첫 목적지인 유레카 전망대로 향한다. 이 전망대는 남반구 최고 높이(297m)를 자랑한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88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단 40초.눈 한 번 깜빡이고 숨 한 번 들이쉬고 나니 어느새 꼭대기.멜버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둑판 모양의 도심 곳곳 녹색의 정원이 펼쳐져 있다. 건물 반 공원 반이다. 디 에지(The Edge)라고 불리는 유리방에서 수십층 높이 빌딩들을 발 아래 두고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전망대에서 도심 이곳저곳을 눈에 익힌 후 거리구경에 나선다. 멜버른 시민들의 약속장소인 플린더스 역을 지난 스완스톤 골목으로 접어든다. "밥 먹을래? 나랑 뽀뽀할래?"라는 대사가 인상 깊었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무지개색 니트와 두툼한 어그 부츠를 신은 여주인공 은채가 배회하던 골목이 바로 이곳,스완스톤 거리 어귀에 있다. 100m도 채 안 되는 짧은 골목길에 그라피티로 도배가 돼 있다. 드라마에 출연했던 쓰레기통도,그라피티용 스프레이도 그대로다. 골목을 빠져 나와 멜버른에서 가장 오래된 로열 아케이드로 향한다. 19세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곳은 영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두 거인 고그와 매고그가 매시각을 알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와 초콜릿 숍들이 가난한 여행자의 지갑을 열게 한다. 어두운 골목 사이로 내리비친 햇살 아래 노천카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골목을 휘감은 에스프레소 향기가 낯선 여행지를 친근하게 만든다.

멜버른의 명물 마차투어를 하기 위해 다시 플린더스 역으로 향한다. 두 마리의 말이 트램과 자동차를 피해 도심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닌다. 발레리나의 모습을 형상화한 빅토리아 아트센터의 철탑,물 위에 떠 있는 듯 설계된 국립미술관이 눈길을 끈다. 30여분의 짧은 호사를 뒤로 한 채 호주 최대의 고딕 건축물인 성 패트릭 성당을 만나러 간다. 해질녁 블루스톤으로 마감된 성당의 외관이 온통 황금색으로 물결친다.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화려함을 뽐낸다. 성당에서 10분 거리의 피츠로이 가든에는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속삭임과 새들의 재잘거림이 어우러져 어둠이 깔린 멜버른에 낭만을 더한다.

■눈부신 해변과 트램 레스토랑

시티에서 트램으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세인트 킬다 해변.아침 햇살을 온 몸으로 받은 바다가 눈부시게 파란빛을 선사한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무혁이 한없이 바라보던 바다가 바로 이곳.멀리 수평선 끝자락에 놓인 화물선의 뱃고동이 더욱 애달픈 건 시간을 거슬러 드라마 속 무혁의 쓸쓸함이 느껴져서일까.


"와인천국 야라밸리, '음주 DNA' 자극해요"

세인트 킬다 해변에서 남쪽 끝에 남극이 있다. 멜버른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보다 가깝다. 갑자기 우지끈하고 남극의 빙하가 갈라져 해변으로 밀려올 것 같다. 해변에 정박된 고급 요트들이 한적한 바다에 여유로움을 더한다.

여행자의 쓸쓸함을 자극하는 세인트 킬다를 뒤로 하고 멜버른 멋쟁이들을 만나러 채플 스트리트로 향한다. 호주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집결한 이곳은 멜버른 페스티벌에 맞춰 형형색색 파티용 드레스들로 가득하다. 가격도 요새 말로 참 착하다. 이 거리의 명물인 잼 팩토리.예전에 잼을 만들던 공장을 개조한 쇼핑몰로 전통 공예품부터 최신 유행 패션까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해가 질 무렵 진한 자줏빛의 트램카 레스토랑에 올랐다. 콜로니얼 시대의 실내 장식을 한 트램을 타고 멜버른 거리를 관광하면서 호주 정통요리를 먹는,19세기 귀족 부인이 되는 시간이다. 트램이 움직이자 백발의 웨이터가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를 멋드러지게 부르며 분위기를 돋운다.

멜버른의 야경을 보기 위해 리알토 타워에 있는 전망대에 오른다. 시티를 360도 파노라마로 시원하게 볼 수 있게 사방이 탁 트여 있다. 낮에 봤던 시티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숲속의 증기기차와 와이너리

이른 아침 멜버른 시민들의 휴양지인 단데농 전원지역으로 향한다. 평일이라 그런지 도로가 한산하다. 1시간여를 달리니 눈앞에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인 순수한 숲속 세상이 펼쳐진다. 그 숲속엔 100년 된 증기 기관차가 숨어 있다. 일명 퍼핑빌리 증기 기관차.동화 속에서 나올 것 같은 하얀 수염의 기관사 할아버지가 출발을 알리는 기적을 울린다. 칙칙폭폭 기관차가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며 여행자에게 청량한 공기를 선물한다. 가슴 가득 상쾌함을 채우고 호주의 상징 캥거루와 코알라를 보기 위해 힐스빌 야생동물원으로 발길을 달린다. 일흔을 훌쩍 넘긴 자원봉사자 메리 할머니가 동물원 곳곳을 소개해준다. 진돗개와 비슷하지만 꼬리가 밑으로 처진 호주 들개 딩고,타조를 닮은 호주의 국조 에뮤,수백종의 유칼립투스 나무 중 12종만 먹는다는 예민한 코알라 등 200여종 2000여마리의 동물이 자연상태로 사육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야생 그대로다. 사람들은 단지 다친 동물들만 돌볼 뿐이다.

다시 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을 달리니 도로 양옆에 끝이 안보이는 포도밭이 펼쳐진다. 비옥한 토양과 서늘한 기후 조건 덕분에 호주 최고 와인 생산지로 손꼽히는 야라밸리다. 크고 작은 70여개 와이너리가 여행자의 음주 DNA를 자극한다. 돔 형태의 와인 테스팅 공간으로 유명한 도메인 샹동에 들러 스파클링 와인을 시음한다. 입 안을 감싸고 도는 알싸한 맛이 와인 초보자가 먹기에 부담 없다. 호주의 유명한 와인 평론가 제임스 할리데이가 세운 콜드스트림에서 피노누아 품종을 사용한 2006년 빈티지를 홀짝거려 본다. 달콤하면서도 상쾌하다. 육류와 궁합이 맞다나.

야라밸리에서 처음 자리잡은 와이너리인 예링 스테이션에 도착하니 취기가 적당히 오른다. 느릅나무 길과 와인을 숙성시키는 오크통을 보관하는 곳 등 모든 건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단다. 그중 하나인 샤토 예링은 1854년에 지어진 건물로 영국풍의 고풍스런 숙소다. 포도밭 너머 강이 있고 강 너머 언덕이 끝없이 이어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이곳에서 로맨틱한 허니문을 꿈꿔본다.

■정원에서의 여유

여행 마지막 날,시티를 남북으로 가르는 야라강 크루즈를 탄다. 강 옆은 온통 푸른 잔디밭이다.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데이트를 하는 연인,책 속에 빠져든 중년…모두가 잔디밭에 올라와 있다. 크루즈가 서서히 속력을 내자 바람이 제법 차갑게 얼굴을 스친다. 고급 호텔과 노천카페를 지난 크루즈는 신도시 도클랜드의 첨단 빌딩 속으로 들어간다.

1시간여의 유람을 마친 후 세계에서 가장 멋진 정원 중 하나인 로열 보태닉 가든으로 향한다. 유칼립투스를 중심으로 1만200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산책로 곳곳에 호수가 있고 넓은 잔디가 있다. 수백년은 된 듯한 거대한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서 한 커플이 웨딩촬영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연인들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최고의 행운으로 여긴다고.여행을 마무리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사흘 동안 수없이 만났던 멜버른의 자연과 예술.자연은 채울 줄만 알았던 여행자에게 비움의 시간을 주었고,예술은 점점 메말라가는 감성에 느림의 여유를 던져주며 잠시 쉬어감을 허락했다.

멜버른=글 사진 남정혜 기자 jhnam@hankyung.com


[ T I P ] 멜버른 직항편 운항 … 매주 월ㆍ수ㆍ금요일

멜버른은 호주 남동부 빅토리아주의 주도다. 시드니에 이어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1901년부터 1927년까지 호주연방의 수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보다 2시간 빠르다. 통화단위는 호주달러.요즘 환율은 현금 매입 기준 1호주달러에 898원 선.

대한항공이 멜버른 직항편을 매주 월ㆍ수ㆍ금요일 세 차례 운항하고 있다. 멜버른 시내는 정방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도 한 장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다닐 수 있다.

트램을 이용하면 주요 관광지에 쉽게 갈 수 있다.

호주정부관광청 (02)399-6502,빅토리아주관광청 (02)752-4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