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급상 대형주보단 중소형주 좋아, 배트 짧게 잡고 눈높이도 낮춰야
20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주식시장에 푹 빠진 청년이 있었다. 재수 시절부터 주식투자하는 재미로 살았다. 소위 일류 대학을 가서도 관심은 바뀌지 않았다. 대학 생활 내내 전공 공부는 제쳐두고 상장기업 분석에 매달렸다.
사회에 나와서도 주식을 업으로 삼았다. 증권사란 제도권에서 금새 뛰쳐나와 십수년째 혼자 주식시장에서 고전분투하고 있다. 하루하루 피말리는 주식 세계에서 몇번이고 빈털털이가 됐다가 다시 우뚝 일어서길 되풀이했다. 그의 인생에서 주식을 빼면 논할 게 없을 정도다. 20년 동안 주식과 함께 뒹굴렀고 지금도 주식에 미쳐 살고 있다.
그가 바로 재야고수인 하태민 아크론 대표(40)다. 하 대표는 수년째 한경와우TV 등 방송에 출연하고 있고 각종 신문에도 증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공공성을 인정받는 그지만 제도권 경력은 미천하다. 지난 1995년 서울대 사회학과(90학번)을 졸업한 직후 8개월 동안 부국증권에서 일한 것이 전부다.
그는 부국증권을 나온 직후 TIC라는 회사를 차려 기업 분석과 코스닥 등록 대행,IR(기업설명) 대행 등 주식과 관련된 일을 닥치는대로 했다. 1998년 현재 운영하고 있는 기업분석 전문회사 아크론을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유료 기업분석 정보를 팔고 있다.
"지난 20년간 주식시장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가장 보람찬 일이죠.주식시장의 승자는 대박 종목을 발굴하는 사람이 아니라 번 돈을 잘 지키는 투자자입니다. 수년간 활황장에서 벌어놓은 돈을 10월 폭락장에서 단숨에 날린 투자자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
하 대표는 재야 세계에서 20년간 주식 전문가로 살아남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며 옛날 경험들을 하나 둘씩 꺼내놓았다. 그가 대학 2학년의 일이다. 주식시장을 공부하느라 남들 다 하는 미팅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생의 낭만을 버린 그는 도서관에서 종목을 분석하고 경제신문을 탐독하면서 보냈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는지 그의 투자 수익률도 100%가 넘어섰다. 당시 영우통상(현 한솔CSN)이 땅을 판다는 공시를 접한 그는 미수까지 최대로 질러 주당 1만원 가량에 전 재산을 몰빵했다. 당시엔 땅을 파는 게 호재였는데 주가는 돌연 기세 하한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당시 새 자동차 가격이 500만원대였는데 매일 자동차 한대씩 날렸어요. 결국 증거금 요구가 들어와 부모님께 사정해서 추가로 돈을 부었지만 결국 반대매매 당하고 깡통계좌만 남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가가 급반전해 주가가 1만8000원까지 솟아버리는 겁니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자신감이 넘쳤던 것이 화근이었어요. 오만해진 대가를 제대로 받은 겁니다. 외환위기(IMF) 때 주가지수가 300대까지 무너지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
그는 증시 전문가도 시장이 폭락할 때는 손실을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폭락장이 닥쳐 손실이 커졌을 때 남들보다 더 빨리 손실을 회복하려고 기를 쓴다는 점이 다르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차이점을 '생존 능력'이라고 했다.
"폭락장에서 고수와 일반인의 차이는 명확해집니다. 10월에 대형주조차 70% 이상 빠졌다는 것은 기록적인 일입니다. 투자자들은 이런 폭락장에 놓이면 손실을 따져보면서 멍해지죠.망연자실하는 순간 이성을 잃고 그래서 손실은 줄기는커녕 더 늘게 됩니다. 하지만 준비된 선수들은 다릅니다. "
그는 업종 불문 기업별 히스토리를 꿰고 있는 것은 물론 하루하루 달라지는 낙폭과대주의 하락률을 파악하고 다니고 말한다. 또 심도있는 기업 정보까진 모르더라도 환율 하락 수혜주,금리 인하 수혜주 등등 기본을 챙기면 10월 막판 반등장에서 빠르게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 대표는 아직도 매일 같이 기업분석에 하루 시간 대부분을 할애한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서울 강남역 부근에 조그만 학원을 열고 주식 교육사업에도 나섰다. 투자자들에게 시장과 기업 분석 요령을 강의하고 실전 매매사례를 되짚어보면서 도움을 준다는 취지다.
"예전엔 어수룩하게 차트만 보고 투자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통화스와프 CDS(신용부도스와프) 프리미엄 등 알아야할게 너무 많습니다. 주식시장이 좋지 않을수록 공부를 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 주식시장의 중장기 전망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동안 주식시장이 주식형 펀드로 자금이 유례 없이 흘러들어와 수급으로 오른 장이란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대량환매(펀드런) 우려도 배제할 수 없어 상승 요인이 제한적이라고 설명했다.
하 대표는 "수급적으로 펀드 환매에 따른 매물이 나올 것으로 우려돼 앞으론 대기업보단 상대적으로 중소형주가 유망하다"며 "철저하게 개별종목 위주의 시장으로 시장이 세분화될 것으로 예상되는만큼 당분간 목표 수익을 낮게 잡고 단기 매매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단기적으로 낙폭과대주인 조선주를 유망업종으로 꼽았다. 해운 운임지수가 급락한 데다 업종이 기울고 있지만 내재가치만으로 따져도 초우량주라는 것이다. 특히 한진중공업은 환헤지를 하지 않아 환율 수혜가 기대되고 자산가치에 비해 시가총액이 너무 적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헝가리 출신의 전설적인 투자자 앙드레 코스톨라니도 주식투자로 세 번을 완전히 망하고 일어나봐야 전문가라고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기는 투자 손실이 아무리 커도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살아남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남은 원금을 소중히 여기고 반등을 준비하고 있으면 만회의 길이 분명 열릴 겁니다. "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