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모두 '12개의 비밀'을 돌았다. 연재가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이제 대한민국 최강의 기업 조직 삼성을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 삼성은 이건희 전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지 불과 10여년 만에 세계 톱 클래스의 기업으로 올라섰고 삼성에서 일을 배운 사람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역량 있는 인재로 대접을 받는다. 그렇다면 삼성의 미래도 그러할 것인가.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일 것이다. 무려 20조원에 가까운 경상이익을 내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2004년에도 이 전 회장은 "5년,10년 뒤에 먹고살 거리를 생각하면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삼성은 이 전 회장이 가졌던 위기의식의 실체와 맞닥뜨리고 있다. 단지 그룹의 중심축이었던 이 전 회장이 퇴진하고 전략기획실이 해체됐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축적해온 조직의 내적 역량이 지금 같은 격변기에 맞지 않는다는,일종의 '미스매칭'이 발생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관리의 위력ㆍ최고경영자의 의지와 중간관리자의 능력이 시너지를 내다

과거 삼성의 모토는 '관리의 삼성'이었다.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에 만들어졌던 이 표현은 '일등 삼성'과 동의어였다.

1987년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고 난 뒤 '인재-기술 제일주의'를 표방하고 나왔을 때도 삼성을 부르는 한마디는 '관리의 삼성'이었다. 삼성의 '관리'는 인사와 예산을 통제하는 데서 시작된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을 때,그리고 지금처럼 인적 구성과 비즈니스 모델이 다양하지 않았을 때 '관리'는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전 회장은 자신이 회의석상에서 했던 발언을 모두 녹음토록 해 그룹 임원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했다. 이른바 '관리쟁이'들은 회장의 발언에 녹아 있는 강조점과 이행사항을 따로 분리해 필요한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앉히고 예산을 배분했다.

이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톱다운(Top down)'식 경영혁신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GE의 경영자들은 지금도 중량급 고객들을 만날 경우 5년 내에 10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군 선정을 협의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회의체가 80여개에 이른다는 전언이다. 삼성이 '관리'가 강했던 이유는 최고경영자의 아이디어나 의지를 구체화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재들로 가득 찼던 옛 전략기획실은 이런 중간 관리자들의 집합체였다. 업무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완벽한 일처리,철저한 사후평가,끝을 보는 회의 문화 등은 여전히 삼성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 창조,메아리만 남다…관리와 창조의 어정쩡한 중간단계에서 방황하다

'관리의 삼성'이 퇴조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초 이 전 회장이 돌연 '창조경영'을 주창하고 나왔을 때였다. 많은 삼성 사람들은 관리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경영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어감상으로도 '관리'와 '창조'는 상극인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창조'라는 표현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상적이라는 데 있었다. 톱다운 혁신에 익숙해 있던 삼성인들은 애매한 슬로건에 당장 구체적인 변화의 방향이 제시되지 않자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 것이냐"고 스스로 반문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삼성 특검'사태가 터졌다. 그룹은 임직원들에게 창조경영의 진면목을 이해시킬 시간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추상화돼 있는 슬로건에 강력한 실행의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는 틈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많은 삼성인들은 스스로 '관리'와 '창조'의 어정쩡한 중간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느낀다. 이 같은 딜레마는 미래 삼성의 위기 요인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우리가 '뜨는 조직'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제시했던 편제 협력 선택 네트워크 차별화 등의 문제는 모두 경영의 방침,목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이 강조한 창조는 예술가나 과학자들이 언급하는 것과 다르다. 기업에 있어 창조는 뭔가 새롭고 유용하며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고,창조경영은 '창조적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지속적인 혁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경영이 성공하려면 창조적 아이디어가 사장되지 않고 혁신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실행프로세스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관리'와 '창조'는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의 전통적인 '관리'는 이제 그 대상과 방식을 바꿔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인력 영입만으로는 조직의 창의성을 극대화할 수 없다. 비록 아이디어가 많은 인재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창조성을 발현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자유방임형으로 관리할 수도 없다. 실행전략 없이 아이디어만 만발하는 조직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 관리와 창조의 화해…창조적 활동에 대한 지원과 통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창조적 시스템이론을 제시한 미국 시카고대학의 미하이 칙센미하이 교수의 분석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창조경영의 시스템은 △개인(individual) △분야(field) △영역(domain)으로 구성된다. '개인'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분야'는 개인의 아이디어를 선별하고 자원배분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기업의 경우 사업화나 투자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결정권자다. 마지막으로 '영역'은 과거에 생성된 지식이나 정보 규칙 절차 등의 집합체다. 기업 내에 존재하는 각종 정보 지식 기술 관행 문화 제도 등이 해당된다.

창조경영은 이 3개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구현된다. '개인'이 고정관념을 깨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분야'의 의사결정권자는 이를 평가하고 자원배분 여부를 결정한다.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면 새로운 지식이나 관행 등의 형태로 '영역'에 정착한다. 따라서 아무리 창조적 아이디어가 백출하더라도 평가나 선택을 담당하는 의사결정권자가 거부해 버리면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또 창조를 일선에서 담당하는 개인의 역량이 떨어지거나 이들이 일상활동에 매몰돼 새로운 시도를 할 여력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관리쟁이'들은 창조역량이 뛰어난 인재를 외부에서 뽑아오거나 아니면 일상에 지친 직원들이 창의적인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반면 창조적 혁신이 탁월한 한두 사람에 의해 간헐적으로는 일어나는데,지속화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는 창조를 지원하는 내부 인프라를 뜯어고쳐야 한다. 창조지향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관리방식과 조직문화에 변화를 줘야 한다.

결국 기업 조직에서 관리와 창조는 따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창조적 활동에 대한 지원과 통제는 관리가 지향해야 할 양날의 칼이다.


▶▶ 전통적으로 위기에 강한 삼성, 어디까지 진격할 것인가

돌이켜 보면 이 전 회장이 창조경영을 추진하려고 했던 이유는 경영시스템 전반을 창조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재설계함으로써 과거 '7―4제' 도입을 통해 그랬던 것처럼 기업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단어의 추상성에 매몰됐던 것은 창조가 특별한 개인에 의해 이뤄진다는 선입관,창조활동은 일상적인 경영과는 유리된 특별한 것이라는 오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아이디어나 창의성은 화려할 수는 있겠지만 창조경영을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으로 착근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중간 관리자들의 역할을 종전과 다른 시각으로 정립하고,필요한 자원을 적재적소 적기에 투입하는 새로운 관리모델이 필요하다. 시간과 비용 절약을 위해 핵심기술이나 아이디어를 외부에서 수혈하는 전략도 긴요하다. 하지만 삼성이 지금의 진용으로 이런 과제들을 능소능대하게 수행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통적으로 위기에 강한 조직이긴 하지만 관리와 자율이 공존하는 경영체제를 실험해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결국 창조경영은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삼성의 현 경영체제와 맞물려 상당한 정도의 탐색기간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도적 비용의 크기에 따라 삼성의 앞날,우리경제의 지평도 달라질 것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