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서강대 교수·경제학>

'美-EU-中' 주도권 싸움…우군 필요해

한국이 FTA 비준하면 美도 응답할 것

미국에서 백악관 주인이 바뀌면 무려 3000여명의 고위직 인사가 자리바꿈을 한다. 백악관 참모진과 장·차관은 물론 국책연구소장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물갈이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계의 부시 인맥과 네오콘,그리고 신자유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나가고 새로운 정책철학을 가진 민주당계의 '오바마 사람'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최초의 유색인(흑인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다)이란 점에서 오바마 당선인은 미국 역사에 큰 획을 긋지만 이에 못지않게 백악관 집무실에 앉자마자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바쁘고 '당황스런' 대통령이 될 것이다. 국정의 큰 그림을 그릴 여유도 없이 세계경제를 무차별적으로 난타하는 금융위기의 불을 꺼야 하는 소방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집권 초 오바마 대통령은 눈앞의 불끄기에 바빠 태평양 건너 멀리 있는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일에 눈 돌릴 틈이 없으리라.그렇기에 미국에서 비준은 국내문제를 안정시키고 한숨 돌리는 내년 말쯤 거론될 것이다. 대략 이 정도가 오바마정부에서 한·미경제협력의 척도역할을 할 FTA 비준에 대해 우리가 예상하는 시나리오다. 여기에는 미국이 손놓고 있고,어쩌면 오바마 대통령이 비준 자체를 거부할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먼저 서둘러 FTA를 국회에서 비준할 필요가 있느냐는 다소 냉소적인 시각이 깔려 있다.

내년 초 성조기 앞에 취임선서를 한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한·미FTA를 보게 될 것이다. 우선 그가 제일 먼저 통감할 것은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 때문에 그간 미국이 누려온 헤게모니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는 위기감일 것이다. 지금 국제질서의 새판 짜기에서 유럽과 중국은 한 나라라도 더 우군으로 만들고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IMF체제에 반기를 드는 '신(新)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과의 FTA협상을 연말까지 마무리짓자며 서두르고 있다. 또한 막강한 외환보유를 바탕으로 아시아 통화금융체제를 만들고자 하는 중국은 한국과 통화스와프를 해주며 FTA도 빨리 성사시키자고 한다. 한국경제를 거대한 중화경제권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이 미국-유럽-중국으로 이어지는 삼극체제 간 주도권 싸움에 무시 못 할 중간자 역할을 하는 한국과의 FTA비준을 거부한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어떠한 파장을 미칠지를 현명한 오바마 대통령은 충분히 예견할 것이다. 일부에서 우려하듯 오바마 정부가 결코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공화당 정부와 달리 전통적으로 민주당 대통령은 공정무역을 신봉한다. 심각한 경영난에 빠진 미 자동차업계를 달랠 적당한 명분만 찾고 한·미간의 공정무역에 관한 기본인식만 같이 하면 미국에서 반드시 비준된다. 후보시절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격렬하게 반대하던 클린턴도 대통령이 된 다음엔 의회비준을 위해 발벗고 뛰었다.

사실 작년 봄 한·미FTA 타결은 두 나라를 과거의 단단한 동맹관계로 다시 묶어 놓았고 우리는 벌써 이 덕을 세 번 보았다. 일본과의 독도분쟁에서 미 지명위원회의 독도영유권 원상회복,이달 중순 있을 G20회의에 한국 초청에 이어 파격적인 통화스와프 협정이 그것이다. 물론 우리가 먼저 비준할 때의 득실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크게 보아 실보다는 득이 클 것이다. 미국을 자극하고 자동차 추가 협상을 요구해올 경우 보다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 마지막으로 EU와의 FTA협상을 연말까지 마무리짓고 중국 일본과의 정부간 협상을 시작해 미국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나가는 전략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