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엔 '일본이 이런 허튼 협박까지 하는구나'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요즘엔 안타깝게도 '그게 허튼 협박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달 미국발 금융위기로 국제금융시장이 경색돼 한국의 멀쩡한 은행들이 달러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고,나라 안팎에서 '외환 위기론'이 고조될 때 결국 우린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긴급 제안한 한·중·일 정상회담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3국이 공동 대처하자는 명분이었지만,일본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한국이 긴급구조신호(SOS)를 친 것으로 이해했다. 당초 지난 9월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중·일 정상회담엔 한국이 독도 사태를 이유로 시큰둥했다는 점에서 체면이 구겨진 건 분명했다. 한국 정부가 요청한 일본 중국 등과의 800억달러 아시아 공동기금 조성이나 통화 스와프(교환)도 마찬가지다. 아쉬운 한국이 손을 벌린 꼴이 된 건 틀림없다.
다급한 한국에 일본은 야속하게도 차갑게 나왔다. 한국 중국 등과의 공조를 전혀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한국에 대한 지원엔 분명 소극적이다. 통화 스와프만 해도 그렇다. 전혀 불가능할 것 같던 한국과 미국 간 원·달러 스와프는 성사됐지만,기존의 통화 스와프 규모를 늘리자는 일본과의 논의는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아시아 공동기금도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경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우리 입장에선 참 '속 좁은' 이웃을 둔 셈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중국에 이어 세계 2위 외환보유액을 가진 부자 나라가 일본이지만 이웃 한국엔 인색하기 그지 없다. 궁지에 몰린 미국의 모건스탠리엔 90억달러(약 10조원)나 지원하면서 한국엔 너무한 것 아니냐고 서운해 할 수도 있다. 최근 도쿄를 방문한 정부 관계자도 한국에 대한 일본의 냉랭한 태도에 "일본은 아시아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문제는 아무리 속좁고 인색하더라도 일본은 무시할 수 없는 부자 이웃이란 사실이다. 한국의 수출 비중만 봐도 중국(22%) 미국(11%)에 이어 일본(7%)이 세 번째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 규모는 일본이 올 들어 9월 말까지 8억8400만달러로 미국(9억4700만달러)과 맞먹는다. 한국 제조업은 또 부품·소재 분야에서 일본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가.
역사적으론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지금도 허튼 협박까지 하는 이웃이지만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서다. 일본처럼 까다로운 이웃을 둔 것도 결국 우리의 숙명이다.
도쿄 차병석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