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전 호치키스 침 기계 1대로 시작


흔히 호치키스라고 부르는 스테이플러.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이플러를 유심히 살펴보면 십중팔구 '평화(Peace)'라는 상표가 붙어 있다. 스테이플러침도 마찬가지. 이 상표를 쓰고 있는 업체는 피스코리아. 국내 스테이플러와 스테이플러침 시장의 70% 정도를 장악하고 있다. 스테이플러뿐 아니라 펀치,가위,커터,스탬프,핀 등을 생산하는 등 금속문구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업체다.

1959년 설립된 피스코리아의 창업주 신중규 회장(81)은 평안북도 강계군 출신이다. 강계공립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7년 4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때 나이 겨우 열아홉 살 땝니다.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서울로 내려오는 길이었는데,그만 3·8선 인근 황해도에서 인민군에 잡힌 거예요.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이 한창이던 시기였거든요. " (신중규 회장)

감옥처럼 쓰던 창고에 갇힌 신 회장은 억류된 사람들로부터 '월남하다 붙잡히면 아오지 탄광이나 시베리아 벌목장으로 끌려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탈출을 결심한 뒤 야음을 틈타 흙벽을 뚫고 몸을 빠져나왔다. 그를 뒤따라 나온 사람들은 인기척을 느끼고 쫓아 나온 인민군의 총격에 대부분 쓰러지거나 잡혀갔다. 구사일생으로 사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한 그는 당장 생계 유지가 발등의 불이었다. 더욱이 곧이어 터진 6·25전쟁의 포화 속에 끝내 학업의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피난민 수용소에 머물던 동향 출신의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소의 꼬리가 되지 말고 닭의 머리가 되라"는 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장사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장인은 고향 피난민들을 모아 '계'를 결성,그가 1순위로 목돈을 쥘 수 있도록 손을 썼다.

밑천을 마련한 그는 평소 학생들이 자주 오가는 부산 영도 공설시장 앞에서 문방구를 열었다. 경품을 내거는 등 뛰어난 장사수완으로 판매가 잘됐다. 이에 힘입어 점포를 10개월 만에 팔고 국제시장에 문구 도매상을 차렸다. 3층 점포에 물건이 가득 찰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호사다마였을까. 1953년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로 점포가 전소됐다.

망연자실하던 무렵,그의 능력을 눈여겨 본 고향 친구의 제의로 부산 보수동에서 헌책방(고서점)을 시작했다. 친구가 자본을 대고 경영은 그가 맡는 식이었다. 여기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그는 이익금을 갈라 독립,1959년 스테이플러침을 만드는 기계(제침기) 1대를 사들여 회사를 차렸다. 문구 도·소매상 시절 불량률이 70~80%에 달했던 국산 스테이플러침을 직접 제작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던 것.상호는 '평화산업사'로 정했다. 전쟁의 격변기를 거친 신 회장이 얼마나 '평화'를 갈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침을 생산하는 족족 전수검사를 했다. 품질이 좋다는 평판이 퍼지면서 부산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기계 1대로 시작했던 사업은 3년 만에 4대로 늘어났다. 신용도 한몫했다. 다른 생산업자들이 무리하게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도매상을 상대로 들쭉날쭉 가격을 책정해 신뢰를 잃은 반면 그는 한번 물건 값을 정하면 어음이든 현찰이든,어느 지역이건 한 푼도 깎아주거나 올려 받지 않았다. 품질이 좋았던 데다 가격도 일정했던 평화산업사 제품은 도매상들로부터 마치 '금값'처럼 공인된 표준으로 인정받았다.

1960년대 말부터는 스테이플러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마침 국내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면서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신 회장은 "1970~80년대에는 주문량을 미처 대기 힘들 정도로 공급이 달렸다"고 회고했다. 서울지역 납품 물량이 늘어나자 회사를 1971년 서울 성수동으로 옮겼다. 일본의 금속문구제조업체인 MAX와 기술 제휴 계약을 맺는 등 사세가 신장하기 시작했다. 신 회장의 장남 신우용 사장(54)은 1981년 부친을 돕기 위해 입사한 뒤 기술개발과 함께 인천 남동공단 및 경기 이천공장 등으로 생산라인을 확장했다.

해외시장 개척에도 관심을 쏟았다. 특히 1991년에는 부도로 국제입찰에 나온 미국 금속문구업계 4위 업체인 시카고 소재 에이스 패스너(ACE FASTENER)를 당시 시세의 절반도 안되는 250만달러에 낙찰받았다. 특히 공업용 스테이플러 생산능력까지 갖췄던 이 회사를 매입하면서 피스코리아는 기술확장 효과와 함께 미국 전역에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공업용 스테이플러의 경우 미국에 매달 컨테이너 70대 분량을 수출하고 있을 정도다. 이후 멕시코,중국 상하이에도 법인을 세웠다. 신 사장은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섰고 2004년 2월에는 창업주인 신중규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정식 승계했다.

1998년 계열사를 통합해 지금의 상호로 바꾼 피스코리아는 스테이플러침만 해마다 800t 정도를 생산하는 등 연간 매출액이 500억원에 이른다. 현재 상하이 법인과 미국 '피스 인더스트리'(Peace Industries,옛 에이스 패스너)는 신 사장의 동생인 신승용 사장(52)과 신경용 사장(49)이 각각 가업승계의 기틀을 다지고 있다.

신우용 사장은 "그동안 30개 정도의 경쟁업체들이 등장했지만 대부분 피스코리아의 품질 및 신용을 바탕으로 한 유통망과 인지도를 뚫지 못하고 사라졌다"며 "앞으로 글로벌 시장의 최강자로 우뚝 서겠다"고 강조했다.

이천=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