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는 보기보다 터프한 직업 삶의 飛翔(비상)목표가 禁女(금녀)벽 허물어"


"부기장 패지 말고 잘 다녀라."

국내 민간항공 60년 만에 첫 여성 기장에 오른 신수진 대한항공 조종사(40)가 지난 11일 기장으로서 첫 비행에 나서기 직전 동료들로부터 받은 문자 메시지다. 국내 민항기 조종사 3557명 중 여성은 10명.공주 취급을 받아도 시원치 않지만 동료들은 자신을 '한 명의 조종사'로만 볼 따름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씨가 지난 1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국내 최초의 여성 공군비행사'인 김경오 대한민국 항공회 명예 총재(74)를 만났다. 김 총재가 평소 친하게 지내는 후배인 신씨의 기장 합격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김 총재는 '문자 메시지' 내용을 전해듣고는 "예전엔 '김경오'가 나타나면 신기해서 일부러 손을 만져보고 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세월이 참 많이 변했다"며 격세지감을 나타냈다.

17세에 공군에 입대해 19세부터 단독 비행에 나선 김 총재는 유일한 여성 공군비행사였던 데다 미모까지 겸비해 상사와 부하를 가릴 것없이 많은 장병들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았다고 한다. 상사들은 흡사 얼차려를 주는 양,부하들은 보고하듯이 연정(戀情)을 표현했다고 김 총재는 회고했다.

두 사람은 기장이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게 '외로움'이라고 입을 모았다. 10여시간 동안 6㎡ 남짓한 조종석에 부기장과 단 둘이 앉아 항공기의 안위를 책임지는 탓에 엄청난 부담을 느낀다는 것.

'고독한 직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비행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확신하고 있어서다. '고독한 길'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순 없었다. 신씨는 대한항공 등 국적 항공사에서 여성 조종사를 뽑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행을 공부했다. 노스웨스트항공 통역승무원이 된 뒤 미국에 들를 때마다 비행학교에서 틈틈이 비행술을 배웠다. 1994년 9월에는 민항기 훈련학교인 '시에라 아카데미'에 들어가 경비행기 자격증을 따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항공 조종훈련생으로 입사,민항기 조종사의 꿈을 살렸다.

칠순이 넘은 김 총재는 하루에 3시간만 자면서 집 안팎 일을 모두 본다. 밤 11시30분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2시30분이면 눈을 떠 집안일을 시작한다.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생긴 습관이다.

비행이 많은 때는 한 달에 집에 있는 날이 열흘 안팎이라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한다는 것도 고된 부분이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아이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일부러 더 냉정하게 행동한다. 김 총재는 비행을 나갈 때마다 유서를 쓸 정도였다. 그렇게 키운 딸이 국내 영어 교육계의 스타 이보영씨다.

이 정도면 평생 소원을 이뤘을 법한데도 두 비행사 모두 다음 비상을 준비 중이다. 김 총재는 내년 10월 서울에서 열리는 항공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게 목표다. 이번 올림픽은 국제 민간항공 기구인 국제항공연맹(FAI) 부총재직을 20년 넘게 맡으면서 구축한 글로벌 인맥의 도움으로 유치에 성공했다. 현재 보잉 737기장인 신씨는 초대형 비행기인 A380 기장 자격을 따는 게 목표다. 그 얘기를 들은 김 총재는 러시아 비행사로부터 받은 비행기 모양의 브로치를 그 자리에서 행운의 마스코트로 신씨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