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ㆍ금융 구조조정의 고통과 충격이 이어진 10년 전 외환위기 시절,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장고 끝에 결론이 나오면 기자실에 슬쩍 내려와 방향을 흘렸다. 그의 손끝,선문답(禪問答)같은 말 속에 숨은 함의(含意)는 나름의 해석을 달고 시장에 보내졌다. 그가 퇴출 대상을 일일이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저 힌트만 줬을 뿐이다.

메시지를 전하는 '악역'은 금감위 담당 기자들이 맡았다. 구조조정의 충격과 아픔은 그의 독특한 낮은 음성 속에 흡입됐다. 방향을 가리켰을 뿐이지만 그의 손끝과 말에는 힘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신용카드 대란과 경기침체 속에서 2004년 2월 노무현 정부의 구원투수로 재등판한 그는 말 한마디로 다시 시장을 평정했다. "시장은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

요즘 국내 경제ㆍ산업계에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맞물려 퇴출,감원,구조조정의 공포와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 드리웠다. 산업기자가 가장 쓰고 싶지 않은 퇴출,구조조정이라는 단어를 어쩌면 몇 달,길게는 몇 년은 다시 되풀이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요즘 만난 경제계 인사들의 한결 같은 화두와 걱정이 불황과 위기라는 두 단어에 모아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경제기자들도 무슨 뜻인지 헷갈리는 '대주단 협약','프리 워크아웃','패스트 트랙'이라는 핵심을 피해가는 듯한 낯선 용어들이 등장한 것도 느낌이 좋지 않다. 대마불사(大馬不死)로 여겨졌던 대우그룹의 몰락 직전에는 '세미 워크아웃'이라는 묘한 조어가 나왔었다.

그런대로 잘나가는 삼성의 최고경영자(CEO)들조차 지면에 그대로 옮기기 곤란한 속내를 털어 놓는다. "투자ㆍ용과 관련된 로드맵을 그리고 있는데 상황이 어려워 그대로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금융위기의 수순대로 실물경기 침체가 본격화될 것이다. 고민스러운 것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납품가격을 깎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협력업체들은 마지막으로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는데…."

금융권의 한 인사는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지금 누가 먼저 손에 피를 묻히기만 하면 그 다음엔 일사천리로 줄줄이 이어질 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책임과 악역을 떠맡길 싫어하고,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하다는 진단도 곁들였다. 대부분 계열사를 매물로 내놓기에 이른 한 중견 기업에 몸담고 있는 기자의 지인은 더욱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담보를 낸다고 해도 추가 대출을 안 해주고,워크아웃으로 가고 싶어도 안 받아준 채 기다려보라고만 하니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건설회사들이 가입만 하면 1년간 채무상환을 유예해준다고 해도 대주단 협약에 응하지 않는 것은 누가 탈락할지 모르는 지독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빈 지갑을 내보인 많은 기업들은 극도로 초조해진 시장에서 끝없는 추락의 쓴 맛을 보고 있다. 한 대기업 고위 인사는 "해답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문제는 시장에 주는 메시지가 불확실하고 힘과 신뢰가 없는 탓에 공멸의 순간까지도 모두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유근석 산업부 차장 y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