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

자동차는 미국 상징,파상공세 불보듯

우리노조 GM전철 밟지 않기를


한때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다"고 거침없이 말했던,그 천하의 GM이 지금 파산 직전의 처지로 몰린 이유는 많다. 세계시장 흐름과 소비자들의 요구는 무시한 채 자만에 빠져 기술개발과 품질개선을 등한시해온 경영의 실패에서부터,'악마'로 비유되는 노조에 이르기까지.특히 잘 나가던 1950년대 전미자동차노조(UAW)와 업계 간 단체협약의 산물로 등장한 유산비용(遺産費用,legacy cost)은 GM의 숨통을 조인 독배(毒盃)나 다름없었다.

종업원은 물론 퇴직자와 그 부양가족에게 회사가 의료비와 연금을 종신토록 지급하는 이 제도로 2006년 GM이 의료비로만 지출한 돈이 48억달러,생산하는 자동차 1대당 1500달러 꼴이었다. 종업원 수는 8만명인데 회사가 의료비를 대줘야 하는 퇴직근로자(가족 포함)는 43만명을 넘었다. GM퇴직 후 무려 47년째 연금과 의료비를 타가는 노인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기업이 이런 부담을 견뎌낼 수 있을까.

포드,크라이슬러도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다. GM의 몰락을 가져온 그 고질병이 바로 미국 자동차 '빅3'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라는 얘기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몰락은 그들 내부로부터 곪았던 화근이 빚어낸 스스로의 책임인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 차기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자국 자동차산업의 구조개혁을 얘기하기 보다는 빅3에 대한 구제금융에 열을 올리고,한국 자동차를 물고 늘어지는 다급한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빅3가 파산할 경우 당장 300만명의 실업자가 쏟아지면서 경제파국으로 이어질 판이다. 미국 자동차노조는 민주당의 확고한 표밭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자동차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꼭 100년 전인 1908년 자동차 역사를 바꾼 포드의 '모델 T'가 나온 이래 자동차는 미국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꿈을 이뤄준 이 '반값'자동차를 계기로 세계 자동차산업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졌고 이후 한 세기 동안 미국은 자동차 왕국으로 군림했다.

오바마는 정권인수팀 웹사이트 주소를 'change.gov'로 삼았을 정도다. 그 '변화'는 대선 전인 11월3일 버지니아에서의 마지막 유세에서 외친 "상처받은 미국경제를 재건하고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되살리는 것"을 뜻한다. 미국경제 재건,미국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최우선 순위를 자동차산업 회생에 두고,빅3 살리기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미국인들의 정서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자동차산업에 닥칠 시련 또한 간단치 않아 보인다. 자동차의 그 상징성 때문에 미국은 당장 우리 같은 불균형 교역상대를 표적삼아 시장의 상식을 넘어서는 무리수로 파상공세를 펼칠 가능성이 크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 요구는 약과일 것이고,오바마가 주장하듯 "한국은 미국에 해마다 수십만대의 자동차를 파는데 미국은 기껏 한국에 5000대를 판다"는 식으로 우리를 압박할 경우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다. 소비자들이 탐탁해하지 않는 미국 차를 한꺼번에 많이 사줄 묘책이 없으니 국내 생산을 줄이고 미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방법이 보호주의의 장벽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일 것이다. 막대한 투자를 미국 땅에 쏟아 붓고 수많은 우리 일자리를 미국에 넘겨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게 현실로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고,멀리 있지도 않은 위기적 상황이다. 그런데도 우리 자동차산업은 갈수록 답답한 처지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전쟁은 눈앞에 다가와 있는데,회사야 어찌되든 임금 올리기와 과도한 복지 챙기기,파업할 핑계 찾기에만 바쁜 것이 우리 자동차업계 노조세력의 현 주소다. 제발 그들이 미국 빅3를 생사의 기로로 내몬 '악마의 길'을 걷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