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원동 미래엔컬처그룹 김창식 대표(52)의 방에 들어서자 고색창연한 스피커가 눈에 확 들어왔다. 김 대표는 음반과 음향기기 수집 마니아다. 그는 "경영을 맡은 이래 가장 큰 책임감과 두려움을 느낀다"는 말부터 꺼냈다. 두려움의 실체는 60년이나 된 상호를 하루아침에 바꾼 데 있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이 회사의 이름은 '대한교과서'였다. 3대를 이어온 장수기업.교과서 인쇄 사업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전북도시가스,서해도시가스 같은 에너지 사업과 각종 교육·문화사업 등으로 매출 6000억원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중 교과서 매출 비중은 4%에 불과하다.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음악이다. 40년 가까이 빠져 살고 있는 음악 얘기를 꺼내자 기자를 회사 부근 건물 지하층으로 안내했다. 보안카드로 대문을 열고 자물쇠를 서너 개 풀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김 대표의 개인 음악감상실이다.

출입구 정면에는 고풍스런 LP판 4000여장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다. 2000여장이 물에 잠겨 버린 후 다시 모은 판들이란다. 그 오른쪽에는 다양한 모양의 스피커와 앰프들이 배열돼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이 배인 것들이다. 김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음향기기는 모두 20여세트.대부분 1925~1940년 사이 만들어진 미국 독일 영국 일본 제품들이다. 아직도 낭랑한 소리를 내는 영국제 축음기는 100년 가까이 된 제품이다. 대형 진공관 라디오에서는 청아한 국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두툼한 음향기기 족보(?)를 뒤적이며 '웨스턴555 드라이브 25A 혼 스피커' '탄노이 실버 스피커' '제이비엘 파라곤 스피커' '그랑필름필드 유로딘 스피커' '알이 604 로렌츠 파워앰프' '이엠티930 턴테이블' '웨스턴124 파워앰프' 등 자신이 갖고 있는 기기들에 대해 설명했다. 이 중 80년 된 '웨스턴555 매시 드라이브 13A 혼 스피커'는 컬렉션 시장에서 1억1000만원을 호가한다고.

김 대표는 중요한 경영 판단을 내리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면 이곳을 찾는다. "음악을 들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스트레스가 사라집니다. 최고경영자(CEO)는 회사의 얼굴인데 직원들 앞에서 짜증스런 표정을 비치면 안 되잖아요. "

왜 이렇게 많은 음향기기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음향기기는 저마다 색다른 음질을 갖고 있습니다. 첼로 연주곡을 제대로 발현하는 기기가 있는가 하면 오케스트라의 장중함을 잘 표현하는 기기는 따로 있죠.같은 곡도 음향기기를 바꿔 들으면 맛이 달라집니다. " 그는 1910년대 엘리코 카루소의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리더니 앰프와 스피커를 바꿔 가며 들려줬다. "어때요,맛이 완전히 다르죠?" 김 대표는 새로운 음악적 미각을 즐기기 위해 요즘도 틈날 때마다 이베이나 서울 황학동 풍물거리를 뒤져 음반과 음향기기를 수집한다. 즐기는 음악도 클래식 팝 가요 등 다양하다. 한 종류의 음악만 듣는 것은 일종의 편식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여러 음반들 중 자신이 가장 아낀다는 1920년대 파블로 카잘스의 고색창연한 첼로연주 음반을 틀어주며 목소리의 옥타브를 올렸다. "요즘 나오는 디지털 음반은 맑고 깨끗하지만 쉽게 피로감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진공관을 통해 흐르는 아날로그 음악은 자연의 소리에 가깝기 때문에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죠."

김 대표가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고교 1학년 때다. 현재 서울 이태원에서 '올댓재즈클럽'을 운영하는 진낙원 사장 집에 놀러가 음악을 접한 게 계기였다. 그날 이후 진 사장은 40년지기 음악친구가 됐다. 김 대표는 희귀 음반을 혼자만 듣고 즐기기 아까워 지난 3월 이곳에 음악감상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진 사장,만화가 허영만씨 등이 즐겨 찾는 이곳은 이제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방이 됐다.

김 대표의 아버지는 김광수 명예회장이다. 창업자 김기오 선생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아 회사를 키운 제2 창업자다. 그러나 김 명예회장의 눈에는 젊은날부터 음악에 빠져 지내는 아들이 마뜩하지 않았으리라."얼마 전 명예회장님이 지금도 음악에 취해 지내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음악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드렸죠." 그는 오히려 아버지 같은 분이 음악을 알았더라면 더 멋진 인생을 살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미래엔컬처그룹은 1999년 공기업 민영화 1호인 '국정교과서'를 인수·합병하면서 공무원 조직 같은 경직된 문화도 함께 받았다. 이 때문에 유능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입사해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동화돼 버리곤 했다. 딱딱한 기업문화의 껍데기를 깬 것은 김 대표의 '소프트 파워'였다. 60년 된 회사 이름을 바꾼 발상이나 음악과 커피향이 흐르는 사내 재즈카페 개설,평일 근무시간에 직원들을 문화활동으로 내모는 일 등은 그의 말랑한 음악적 감성에서 나왔다. "임직원들이 행복하고 생각이 자유로워야 회사의 경쟁력도 커진다고 확신해요. " 김 대표에게 음악은 숨쉬는 산소이자 경영 에너지다.

글=최규술/사진=강은구 기자 kyus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