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게르만족과 싸워 승리하는 광경으로 시작합니다. 그 뒤로도 로마는 다른 민족과 수많은 전쟁을 벌였고 연전연승했지요.

로마는 기원전 6세기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브리튼 섬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고 잘 짜여진 도로망과 고도로 훈련된 군대로 제국의 영토를 넓혀 갔지요. 가장 강성했던 2세기에 로마제국은 '세계의 절반과 가장 문명화된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357년 율리아누스 황제는 스트라스부르 전투에서 로마군 1만2000명으로 알레마니 군대 3만명을 격파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만에 로마의 체제는 뿌리째 흔들리고 로마군도 '유령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으니,어찌된 일일까요. 그동안 역사가와 문명사가들은 도덕적 타락,토지 생산력 고갈,황제권 불안정,궁정 음모와 군부 득세 등 로마 사회의 내적 요인을 멸망의 근본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런던대 역사학 교수인 피터 히더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에서 그렇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제정 후기 로마는 도덕적,경제적 붕괴 위기에 처해 있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반면 그들이 미개하다고 홀대했던 민족은 고도의 정치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제국이 멸망하게 된 일차적 요인은 사산 왕조의 부상과 훈족의 이동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 볼까요. 376년 고트족 무리가 도나우 강의 국경 지역에 나타나 제국의 영토에 정착하게 해 달라고 탄원하자 로마제국은 별 생각 없이 이를 허락했는데,이 고트족 무리가 폭동을 일으키고 2년 뒤엔 로마군의 3분의 2를 격파하면서 이주를 허락해 준 발렌스 황제까지 전사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476년에는 결국 서로마제국 최후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게 되지요. 그들이 도나우 강을 건넌 지 100년 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 등의 기존 역사관을 뒤엎는 얘기입니다. 게르만족에 대한 인식도 혁명적으로 바꿔 놓는 해석이군요. 그런 면에서 금융 위기로 곤경에 처해 있는 세계제국 미국과 우리의 앞날을 동시에 생각하게 해 주는 책입니다.

문화부 차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