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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응용'이 초일류기업 공통분모

투명 유리컵 하나가 갈색 나무탁자 위에 놓여 있다. 누군가 맥주병을 기울이자 하얀 맥주 거품이 컵 안을 가득 채운다. 액체를 실감나게 표현한 이 장면은 컴퓨터그래픽(CG) 기법 중 가장 어렵다는 '거품 재현 CG 유체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해낸 가짜 맥주 영상이다. 실사와 구분 못할 만큼 감쪽같은 이 기술은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가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해 세계적인 학술대회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관객의 까다로운 눈을 속이며 '리얼리티'에 도전한 이 가짜 맥주 영상은 ETRI와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협회(CSIRO)가 함께 만들었다. 원래 CSIRO가 홍수 피해를 예측하기 위해 만든 수학 모델을 CG에 적용한 것이다.

과학의 수혜로서 디자인이나 영화 제작,CF에 쓰이던 CG 기술이 이제는 오히려 과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활용되고 있다. 사실감 높은 수학 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그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다양한 자연현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제 숫자로 된 자료 대신 실제와 거의 같은 상황을 CG를 통해 미리 경험한다. 보잉과 에어버스 같은 항공기 제작사 설계자들만 해도 초음속 비행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를 충격파와 기체 결함을 찾는 데 CG 실험을 활용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해일이나 허리케인,지진 같은 환경 재앙을 예측하는 분야에서 사용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두 해 전 인도네시아 자바 섬 등을 강타한 지진해일의 경우 리히터 규모 7.7의 강진 직후 미국지질국(USGS)은 비교적 정확하게 피해 지역을 예측했다. 지진이 일으킨 강력한 해일의 움직임과 이동 경로,피해 지역을 예측하는 데 CG가 활용된 것.이 외에도 혈류 움직임을 정확히 포착해야 하는 인공심장 제작이나 공기 흐름을 예측해야 하는 터널 건설에도 활용되고 있다.

CG 기술이 '창조적 응용'을 통해 다른 산업에 적용되면서 인간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기업세계에서도 창조적 응용은 혁신의 시작이다. 일본 소니는 '영원한 모르모트''일본주식회사의 연구소'로 불린다. 기술과 제품 개발력이 뛰어나다는 수사들이다. 그런 소니도 처음에는 기술 모방에서 출발했다. 소니의 세계적인 첫 작품은 주머니에 들어가는 소형 '포켓' 라디오.소니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은 1948년 벨연구소가 만든 트랜지스터에 주목하고 1953년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진공관 대체부품으로 관심을 가진 것이다. 특허권만을 사들인 도쿄통신공업은 문헌에만 의존해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탄생시켰다. 트랜지스터 기술을 창조적으로 모방,신제품을 탄생시킨 셈이다.

카메라의 대명사로 불리는 일본 '니콘'도 유사한 탄생신화를 갖고 있다. 독일의 카메라 기술을 모방했다는 점에서다. 니콘의 전신인 '일본광학'은 창업직후 독일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데려왔다. 전부 월급의 2~3배를 주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이때 카피한 독일 카메라 기술이 오늘날 니콘의 밑거름이 됐다.

물론 창조적 모방에도 전제조건은 있다.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 전자제품 유명 메이커 샤프(SHARP)의 전신인 하야카와금속공업연구소는 1925년 광석라디오의 분석 연구 끝에 소형 광석라디오를 개발했다. 당시 광석라디오 회사들은 밀려드는 수요에만 만족하고 향상된 제품 개발에는 무관심했다. 반면 하야카와는 진공식 라디오인 샤프다임(SHARPDIGM)을 내놓는 발 빠름을 보였다. 이후 하야카와만 생존했음은 물론이다.

트리니트론 브라운관 TV,워크맨 등으로 제품개발을 선도했던 소니도 1980년대 생존의 기로를 경험한바 있다. 유사제품이 봇물 터지듯 뒤 따른 데다 오일쇼크까지 겹친 탓이었다. 만약 소니가 몇 가지 신기술에 안주했다면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나 CBS 레코드를 과감히 사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혁신적 발상의 전환을 통해 신기술을 개발해내지 않으면 세계 일류가 될 수도 없고 생존도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혁신을 바탕으로 창조적 모방을 리드하는 기업.' 일류기업의 명성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최규술 기자 kyusul@hankyung.com